김서하 시인 / 바다로 가면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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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하 시인 / 바다로 가면
마음 뭉친 날 바다로 간다
밤새 내리는 하늘은 반짝이는 꽃들이 가득 핀 꽃밭
빛나는 꽃잎 하나 뚝 떨어져 내 옆에 눕는다 하늘 향기가 난다
푸른 바다에 나를 풀어 헹구고 허전한 마음 감싸면
바다는 다시 내 먼 어머니가 되어 나를 낳는다
-시집 『바다로 가면』 중에서
김서하 시인 / 모티브
당신과 나는 첫만남 조차 불순했다 암막커튼 안쪽은 혼자서 하는 2인극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자주 출몰한다 신의 유희 또는 희롱이라고나 할까 진심이라는 대사를 난독하며 순간을 이해한 정도의 어떤 행위에 불과한 불륜이라는 장르가 사랑이라는 모티프를 자꾸 껴안으려한다 역할이 끝나면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가서 소품인척하면 그만이라는 듯 앞쪽과 옆쪽 표정이 다르고 오른쪽과 뒤쪽 표정도 다르다 그냥 색과 색의 혼합일 뿐 언제나 빗나간 너의 예상과 나의 상상 수상한 관계는 분류가 아닌 부류로 정의됐다. 그날 나의 이중성은 불온했다. 모티브가 먼저 결과를 부추긴 플롯이라고나 할까 시작은 강렬했으나 끝은 지루했다 그러니 모티브의 완성은 이별 만약에 당신이 있었다면 그땐 2인이 하는 1인극 나도 모르는 각주들이 자주 개입하는 이것이 시 쓰기라면 기형이다.
김서하 시인 / 무료와 유료 사이
관람료 없는 꽃길을 지나 전시회를 간다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계절을 큐레이터는 어떻게 설명할지 미술관 초입의 왕벚나무, 노숙하는 봄은 무료다 표구된 풍경에 값을 지불한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살아 숨 쉬는 늦봄의 풍경화를 지나친 그들 눈 내리는 마을* 입구에 아는 척 몰려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멍하니 바라보거나,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그림을 재구성한다 컬러와 구도를 장황하게 풀어 놓는 해설가 도록에 없는 생생한 봄은 모른 척 넘긴다 관람객 하나 장미 넝쿨을 통과해 정지된 해바라기에 입장료를 지불한다 금방이라도 분(粉)이 묻어날 것 같은 액자에 갇힌 나비 산책로를 따라 부전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개화순서에 따라 앞자리 또는 뒷자리에 피는 야생화 오늘의 영산홍이 내일의 영산홍이 아닌데 감상객들 일생일대의 명작을 놓친다
제비꽃이 4월에 낙관을 찍으면 어떤 방부제도 보존 불가한 봄이 진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 마르크 샤갈의 작품 이름.
김서하 시인 / 바람의 근육
낙엽과 꽃의 낙하 이곳은 마당 사구 아침에 떨어진 간밤의 소란이 수북하다
바람 부는 날 적요한 구석은 울퉁불퉁한 바람의 근육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 갈대와 갈대 사이를 통과하는 햇살의 결이 블라인드로 겹쳐진다
두루뭉술하게 뭉쳐지는 바람의 근육들 탈색된 나비 묵은 나뭇잎 하나 영수증의 바코드 망개나무 열매 올 풀린 스타킹이 기묘하게 얽혀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 회색으로 닮아가는 구획
장마철 파열된 근육들로 넘치는 구석의 표정 절뚝거리지 않는다
김서하 시인 / 나무의 세 시 방향
멈춘 페달이 크고 작은 속도를 먹어치운다 경륜장의 곡선 같은 직조법 나뭇가지 사이 절묘한 편경사에 빗방울이 걸려 있다
거미줄의 안쪽은 조여진 축 방사형의 무늬들이 모여 바퀴를 묶고 있다
공중에 걸린 바퀴 은빛으로 빛나는 무늬를 물고 둥근 원을 따라 바람이 돌아간다 트랙이 회전한다 언젠가 발이 끼인 적 있는 뒷자리는 이제 없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붉은 녹은 비행의 흔적 속도란 가변에서 가속되고 중앙의 작은 원은 속도의 집결지다
얇고 질긴 지붕이 태풍을 견뎠다 수상한 웅성거림이 들려올 때마다 지붕을 오므려 몸 안에 숨겼다 아이는 내려오는 방법으로 매달려 있었다
한 마리 절지류처럼 오래 걸려 있는 둥근 방향, 네 번째 다리로 방심의 길목에 돛을 놓는 거미 거미줄이 먹잇감을 염하고 있다
김서하 시인 / 해안선
모든 선은 살아 있습니다
국경 터치라인 실측선 칼날은 고정된 것들이 아닙니다 펄펄 뛰는 곳을 지나간 아주 고요한 침묵 침묵은 골똘합니다
모든 선은 가를 자세와 갈라진 자세입니다
해안선 안으로 밀려온 사체 바다엔 분실물 보관소가 없어서 오래된 유실물을 돌려주기도 합니다
움직이는 해안선은 선이 없습니다
바다가 해안에 지문을 찍고 돌아갑니다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사는 종種들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엄마의 선을 넘어와 나를 남겼습니다
국경은 그 목적을 그은 사람이나 무기는 지나다닐 수 없지만 저녁 어스름이나 산들 바람은 무시로 지나다닐 수 있습니다
해안선은 사람이 긋지 않아서 수시로 들어가고 다시 떠밀려옵니다
김서하 시인 / 드로잉
A4용지에 원을 하나 그렸지 기준점으로부터 파문이 번지는 게 보였어 아다지오, 아다지오, 리듬이 지나간 후 나도 단일폐곡선을 따라 빙빙 돌았지 달아나는 설계도처럼 흘러내리는 데생처럼 파문은 중점을 끌고 표류했지 달리의 시계처럼 모든 시간이 다 휘어진 후 삭망과 삭망 사이 보름달이 일그러졌고 달의 흉터에 살짝 구름이 엉겨 붙었지 변신을 꿈꾸던 나는 끝내 울지 않고 침전을 반복했어 하루에 한 뼘 실선을 아껴가며 지웠어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귀결점처럼 한 선만 남아야 동그라미는 결정되고 말겠지만 결코 원형감옥 같은 것은 떠올리지 않았지 책상 밑은 온통 구겨진 동그라미 A4용지에 원을 하나 더 그렸지 멈추지 않고 단번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독주를 시도했어 녹아내리는 눈사람에게도 회전은 필요하지 그러니까, 내가 완성하려던 것은 시작이라는 한 점이었지
― 『가깝고 먼』고요아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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