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인 / 돌에 속한 사람 외 6편
|
이재훈 시인 / 돌에 속한 사람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몸을 반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진 사람들의 눈빛만 반짝하던 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사람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의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무성한 사실의 돌.
-시집 『돌이 천둥이다」, 아시아, 2023
이재훈 시인 / 넙치
이른 비가 하늘을 덮는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물의 더미에 몸을 맡긴다 세상 풍조가 살결에 새겨진다
퍼덕이며 헤엄쳐본다 수면 바깥의 풍경을 상상한다 포유류와 호모사피엔스의 세계 아가미 잃은 어미가 수면에 떠 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누구일까 모든 배후에 바람이 있다
만져야 하고 맡아야 하는 바람이 물속까지 숨을 불어넣는다 유신론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재훈 시인 / 언젠가는 영월에 갈 것이다
내가 태어났다는 땅에 귀를 대볼 것이다. 영월의 장르가 생길 것이다. 물도 없고 구름도 없고 나무도 없는 중성의 세계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점퍼를 입은 사람들을 볼 것이다. 새로 발행된 지폐의 냄새를 맡지 않을 것이다. 윤리를 잊을 것이다. 늘 어지러운 바닥에 누울 것이다. 친구들을 오래 안 만날 것이다. 창밖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오래 들을 것이다. 무를 수도 없는 사랑을 하고 구름과 약속할 것이다. 세상의 고아가 되어 명왕성의 시민이 될 것이다.
이재훈 시인 / 모래세탁소
암울하거나 창피하지는 않았다 냄새는 윤리가 아니라 단지 서글픈 것이니까 옷을 빨기 위해 코인세탁소에 갈 때마다 발가벗겨진 삶이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 저마다 찌질하고 구차한 시간들이 동그란 금속에 갇힌 채 돌아간다 돌고 돌아간다 다시 돌고 돈다 이별은 늘 예기치 않은 이유로부터 왔고 퇴근길 버스의 사람들은 모두 날 밀쳐냈다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서 불운을 읽고는 커피값을 계산하며 혀를 찼다 내 온몸은 모래로 뒤덮였다 부스러질 것 같은 어깨로 간신히 몸을 떠받친 채 우편함에서 고지서를 뽑고 인터넷 구인란을 딸깍거린다 결코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번번이 빈약한 주머니를 뒤진다 모래가 되어 깊은 구덩이에 빠져있는 앞날 당신은 어떤 희망을 읽고 싶은지 알 수 없다 차가운 김밥을 먹고 뛰어간 자정 녘 대리운전 자동차의 엔진이 술내를 풍기며 터덜댈 때마다 옷에 냄새가 나는지 킁킁댄다 귀가길 모래로 뒤덮여 서걱대는 온몸을 빨기 위해 서둘러 골목길로 뛰어간다 코인만 있으면 빨 수 있는 내 싸구려 시간들이 오늘도 돌고 또 돈다
이재훈 시인 / 눈물로 돌을 만든다
태양은 사막을 만들고 구름은 비를 만들고 눈물은 사람을 만든다
시를 쓰는 사람. 눈물의 사제여.
돌은 복수를 모르고 변신을 모른다. 온몸을 섭리에 맡긴다.
평생 구르는 노동과 몸을 벼리는 일만 안다.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켰다. 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
썩지 않는 형벌을 가졌다. 침묵을 지키는 몸.
공중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땅속에서도 몸을 부딪칠 수 있는 용기.
사람 이전부터 지구 이전부터 우주를 떠돌았을 천형의 몸.
—시집 『돌이 천둥이다』, 아시아, 2023
이재훈 시인 / 환상 연구실
날카롭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무한으로 일면에서 이면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백면에서 천면으로. 너와 나로. 서로의 얼굴을 반사한다. 당신과 당신의 거기 거기와 저기로 침투하고 삽입한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어떤 시간에서 저쪽 시간으로, 굴절되어 파편 되어. 빛으로 바람으로, 공기로 물로.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현재로 회귀하는 나. 떠오르는 당신. 현재의 타인. 미래의 타자. 너의 거울. 당신의 거울. 허구와 진실이 허상과 진리가 허망과 진창이 허세와 진창이. 얽히고설키고 너의 책상에 의자에 시험과 발표를 옥죄고 달랜다. 창작이란, 창조란, 시란 시적이란 당신의 우주를 먹고 싶다. 당신의 얼굴을 넣고 싶다. 활을 겨눈다. 시간을 쓴다. 거울과 보석과 하얀 눈이 쇼윈도에 박혀 있다. 꿈이 무지개로 반사된다. 경계도 없이. 하얗게, 노랗게. 투명하게. 딱딱한 물질로 남는다.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에서
이재훈 시인 /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
단도를 꺼내 당신의 귀를 자르고 싶었어요. 늘 문밖에 서서 나의 독백을 엿들었잖아요. 가까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제가 잘못이죠.
묻고 싶어요. 멀찍이 당신을 따라다녀도 되느냐고. 애초에 모든 것을 부수는 마음이었어요. 경우의 수는 없었죠. 칼에 진리가 없고 달콤한 사과에 진리가 없어요.
자다 깨니 비가 내려요. 베란다에 본드처럼 빗줄기가 흘러요. 슬픔은 멀찍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만지지 못하고, 쓰다듬지 못하고, 홀로 방탕했어요.
당신은 나를 부인하지 않았어요. 당신에게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어요. 나를 감독하고 해설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요. 기대하지 마세요. 강도를 만나면 투쟁하면 돼요. 밤참 같은 미련들을 버릴 겁니다.
영혼의 책이 있다면 마지막 페이지는 어떻게 쓸까요. 표적도 없고, 분홍빛 과거도 없으며 초록빛 미래도 없는데요. 뭐라고 울까요. 저는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데요.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