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 / 시詩, 벼락!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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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다형 시인 / 시詩, 벼락!
보내준 첫 시집, 답례로 온 메일 한 통*이 詩다 "*참! 시도 수선 되나요?"* 추신 한 행,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시벼락! "詩 빼고는 다 수선 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구서동 산18번지 제 단골 '수선집' 이미 문 닫았다 옆구리 터진 생이 목 터져라 수선을 외쳤다 영업을 남발했다 흠집투성이 수선집 근처 마구 내 돌리고 가엾은 생이 받은,
* 문인수 시인. **조지 버나드 쇼의 말.
전다형 시인 / 검문소
참, 나를 증명하란다 이 구간은 투명인간의 세계 일방통행 청맹과니들의 관할 구역 시퍼렇게 날 선 거수경례가 목덜미 바짝 조였다
순간, 오장육부 뒤집어 내용물 게울 수 없고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먹은 마음 지퍼 내릴 수 없는 이 난감, 이 속수무책을 건너뛸 방책은 더더욱 없었다 공명정대한 법치의 손아귀가 볼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였다
미투리 발싸개보다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린 지금 거듭 미끄러지는 연기되는 생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학생증과 출입증 마그네틱에만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가 된 나‘증’들의 지배하에 기호로만 통용되는 세상
철커덕 검문소 차단기 오르고 통과된 육체, 여기 있는 나는 證에 먹히고 그 밖 어디에도 없다
전다형 시인 / 상처로부터
한때 나는 상처의 종이었다 이제는 상처보다 새살을 새살보다 진물을 진물보다 종기를 꽃보다 화농을 화농보다 고름을 믿는 편이다
욱신거린다는 것 언제든 곪아 터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상처로부터 멀어질수록 부풀어 오른 환부 가만 가라앉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을 도려내고 짜낸 자리 아린 시간이 차오르기까지 욱신거린 시간
당신은 상처로부터 도망치는데 얼마나 욱신거렸는지?
상처로부터 도망친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의 약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상처 대신 상이라는 말은 어떤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선물꾸러미 풀면 한 보따리 쏟아지는 윤슬 환한 부위 바람이 바른 고약 약손의 손길 산맥 닮은 실핏줄 거머쥔 강
우리는 상처로부터 거듭 나은 존재들 그러나 상처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 오늘의 일용할 상처와 화농이 천천히 아물고 마침내 새살이 돋는 시간
한때 나는 상처의 종이었지만 주종의 관계를 청산한 수평의 관계 이미 밋밋하게 아문 맨살에서 해를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전다형 시인 / 사과의 토대
얼음골 사과가 도착했다
남명산 95-2번지* 곡률에 에돌려 깎았다 왼손 엄지와 장지 활 삼아 어림잡은 후지부사홍로 아오리! 배꼽과 엉덩이 지축 삼은 정수리 툭 내리쳤다 사과의 핵 심이 칼끝을 물고 늘어졌다 찔리고 찌른 입심을 푹 도려냈다 움푹 파인 심증이 얼비치는 살얼음 한 입 와삭 베어 물자 착! 혀끝을 휘감는 한(寒恨閒) 통(痛)이 솔비톨이었다
짧은 혀로 표정을 핥았다 달 가리키는 손끝만 본 그와 나 사이 프랙탈을 형성 한 감정선이 풍혈을 앓았다 우거진 오해가 산성화를 부추겼다 라쇼몽 현상이 출몰하는 사각지대에서 먹구름이 사과나무를 에워싸고 방언을 쏟아내었다 골 깊은 주름이 아코디언을 연주하자 불화음이 쏟아졌다 야들한 사과 꽃 고막이 찬만 갈래로 찢어졌다
이러저러한 이명에 시달린 여러 해와 달, 사과나무를 짓밟아 놓고 간 음 이탈을 부추긴 힘센 한파에 내밀지 못한 악수? 동의보감, 내경외경잡병침구편을 이룩한 얼음골 사과앓이 앓음앓음 얼음이 꿀을 낳은 사과의 이변! 햇살은 춘화 현상을 모르고 빙점을 치고 오른 발아를 모르고 사과는 사과를 몰랐다
냉가슴 오래 앓은 것은 달았다
*천연기념물 제 224호로 밀양 천황산 중턱 위치, 명의, 허준에게 스승 유의태가 제 산몸을 생체실험용으로 내놓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다형 시인 / 글썽이는 행간들
수덕사 수국이 턱을 괴고 먼 데를 본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이밥 한 그릇 머리를 장식한 고슬 고봉 이밥 한 송이 장식보다 잠식이란 말이 먹힐 때가 있다 잎사귀 산사 넓혀가는 밤이 있었다는 말 무성한 것들 속에는 벌도 몇 마리쯤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올망졸망 또래끼리 흙밥 떠놓고 배웠지 소꿉놀이 한창 무르익고 뜸이 들면 즐거운 탐구생활 아이처럼 명랑하다 눈웃음이 짓는 소꿉 밥 간 맞추지 않고 볼우물 깊어진다 산마루에 앉아 수국과의 거리를 보면 울컥, 밥솥 물 넘쳐 발그레진다 목탁소리가 물소리 따라 마을로 내려가고 산사의 놀이는 그런 것, 죽네 사네 하는 것 수국과 수긍 사이 침묵과 묵언의 범람 그 언저리에서 글썽한 오늘이 평생 수국으로 살겠지 잘 사니? 불어오는 안부 창문에 붙여놓고 설렌다 안녕! 안녕? 묻는다는 것은 그대와 나 조촐한 겸상 받아놓고 밥숟가락 달그락거리고 싶다는 것 함께 잠들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 꿈속에서도 살이 내린다는 것 밤낮 불어오던 오랜 안부처럼 삼삼한 계절이 행간을 몰아올 때 무조건적으로 수국이 핀다
전다형 시인 / 하객들
눈도장부터 찍었다 방명록에 한 줄 덕담 덤으로 얹었다 귓바퀴를 맴도는 주례사 귀 똥으로 앉고 입저울 위 신랑 신부 얹어놓고 이쪽이 처지나 저쪽이 기우나, 눈저울 눈금 어림잡아보는 사람들 내세울만한 안면들 대내적으로 다 내세우고 나서 반반한 인사치레 번지러하게 바른 후 우러러 인산인해를 이루는 식당행렬 금기와 굴레여 튼튼하시라, 금가락지여 한 쌍, 나란히 웃고 섰던 자리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던 그 자리 달콤한 사랑丸, 幻, 빚는 결혼식장 한 쌍, 여린 혀끝으로 간 볼 현실의 맛!
전다형 시인 / 석양을 읽는 매뉴얼
하루를 던져 넣은 대장간 황홀한 우주 한 채 빚는 쇳물 해 굴리고 온 굴렁쇠가 멈춰선 몰운대 모루 위 올려놓고 망치 내리치는 대장장이 글썽이는 윤슬 내안의 열락 그리고 환 해거름이 지은 독박 주관적 진술만 늘어난 바다 먼먼 별이 하나 둘 7부 능선에 들 때 눈시울이 붉은 서녘 눈 둑에 올라앉은 수평선 혓바늘 벌겋게 돋은 혀 김 메고 잡풀 뽑다 온 괭이 호미 낫 이빨 빠진 연장 한 입에 꿀꺽 통째로 삼키는 서녘바다 머리채 잡힌 담금질, 무두질한 제 이력 제 손등 제가 치고받은 정면 승부 흥건하게 번지는 피눈물 훌쩍이는 파도소리
가는 곳마다 쥐어박힌 피멍 자국 마른 해 놓은 빈 용광로에 양수 채워지고 내일을 달굴 불쏘시개는 어둠만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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