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이 시인 / 오래전 그날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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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이 시인 / 오래전 그날
주전자 한가득 물을 끓여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담가놓았다 대야의 물이 빨리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며 갈급증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방정을 떨다 은빛 몸뚱이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안개
최루가스가 분가루처럼 뿌옇게 덮인 거리에서 유난히 번쩍이던 하이바 도망가다 넘어진 내게 차마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한 백골단의 하이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끊임없이 모서리를 내리치는 두려움에 둥글어지지 않는 기억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만나서 서로에게 스미는 것은 사랑일까 델 것 같은 뜨거움보다 표정 없는 차가움보다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더 위험스러워 몸뚱이 안팎으로 등을 맞댄 가장 뜨거웠을 때와 가장 차가웠을 때의 온도가 같아지는 순간
삶은 미끌미끌, 또 미끌 저도 모르게 격렬한 몸살을 앓으면서 가는 것을
김사이 시인 / 가끔은 기쁨
검은 얼룩이 천장 귀퉁이에 무늬로 있는 것 곰팡이꽃이 옷장 안에서 활짝 피어 있는 것 갈라진 벽 틈새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
더우나 추우나 습한 부엌에서 벌레랑 같이 밥 먹는 것 화장실 바닥에 거무스름한 이끼들이 익숙한 것 검푸른 이끼가 마음 밑바닥을 덮고 있는 것 드러나지 않고 손길 닿지 않는 곳에 끈적끈적함이 붉은 상처처럼 배어 있는 것 삶 한켠이 기를 써도 마르지 않는 것
바람 한점 없이 햇볕 짱짱한 날 지상의 햇살 모두 끌어모아 집 안을 홀라당 뒤집어 환기시킬 때면 기름기 쫘악 빠진 삶이 가끔은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해져 고슬고슬해진 세간들에 고마워서 그마저도 고마워서 순간의 기쁨으로 삼고 또 열심히 살아가는
김사이 시인 / 갱년기
첫사랑이 가고 시가 왔다 시와 동행이 시작되었다 연애하듯이 쓰고 살림하듯이 썼다 시의 본성은 노래라고 했는데 내 시는 노래가 아니라고 한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노래는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슬픔의 무게가 가벼웠든 깊었든 그만큼의 서사는 남을 테지만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온몸으로 저항한 흔적은 희미하고 전전긍긍하는 나를 보는 나의 정면은 신파에 취해서 길인지 수렁인지 헷갈리며 울다가 쓰다가 웃다가 흥얼거리다가 팔방의 물결이 밀어내는 대로
김사이 시인 / 예감
낮술에 취한 남자씨들이 비틀거린다 인도를 장악하고 갈지자로 걸어온다 느닷없이 달려드는 일상의 예감들 차도로 내려설까 뛸까 망설이다가 눈이 부딪쳤다 그들과 교차하는 순간 풀린 눈으로 피식거리며 팔을 쭉 뻗는다 가슴을 팍 치고 간다 화가 나서 가방으로 내려치려니 키득거리면서 술집으로 들어간다 허공에 머물다 툭 떨어지는 가방 한참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쫓아가서 싸울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다 두려움은 내 몫이다 뒤통수로 그들의 웃음을 읽으며 주저앉았다 몇날 며칠 끙끙거리며 나를 달랜다 명백한 고의였으나 술에 취했으니 너그럽게 잊어주는 것도 내 몫이다 아무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날이다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에서
김사이 시인 / 성실한 앨리스
찬밥 남은 밥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때 무조건 먹는다 내 밥 구하려고 남의 밥을 하러 와서 쉴 틈 없이 밥을 해도 내 밥은 불안정한데 나는 언제 사장의 가족이 되었을까
이모 띵동 엄마 띵동 아줌마 띵동 여기요 저기요 띵동 일용직 아줌마나 돈벌러 온 이주민 아가씨나 어이 띵동 여보 띵동 미스김 띵동 띵동 시간을 떠도는 대기번호 허공에 떠 있는 가족
삶이 근육통에 관절통으로 삐거덕거리고 절룩거린다 언제부터 아팠는지 왜 아파야 하는지 이브가 여자로 기록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되었는지 몰라 여자의 노동은 속절없이 떠도는 뜬구름 같은 사랑일지라도
사랑없는 섹스 같은 앨리스의 노동 아버지나라에서 찬밥 남은 밥처럼 먹을 수 있을 때 무조건 먹는 성실한 날들
김사이 시인 / 카타콤베
막차를 타려고 뛰어가는데 지하도 큼직한 기둥들 사이로 웅크린 돌덩어리들 아니, 인기척을 내는 소름 확 끼치는 거대한 짐승들 있다 순간 가슴 벌렁벌렁거리게 하는 이 고요 카타콤베
내 웃음의 이면이다 노동자도 수입하는 갖출 것 다 갖춘 불빛의 地下 지하의 지하 지하도 없는 지하
살아 있음을 한 끼니로 간청하다가 절망도 없이 잠을 청하는 이곳을 지날 땐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라 뼈다구만 남은 이상주의자들도 죄를 고백하며 걸어야 하는 카타콤베
내 등줄기에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혹처럼 자란다 나를 구역질한다.
김사이 시인 / 체온을 나눠주세요
해가 꺼지지 않은 밖에서 어둠이 잠을 자는 곳으로 들어와도 어디선가 시시때때로 쇠 치는 소리가 난다
말랑말랑 피가 도는 몸에 깡통이 생겼다 깡통이 커질수록 말랑하던 나는 황폐한 허허벌판으로 변해 가고 있다
찍소리 안 하는 건 적당한 비타협이라고 사랑을 버리는 것이 잘사는 법이라고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야 산다고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고* 깡통이 끊임없이 주문을 건다
차라리 깡통 안에서라면 살아가는 데 안전할까 자유를 팔면 밥을 살 수 있는지 노란 나비에게 물어나 볼까
내 안의 깡통과 피터지게 싸운들 권력은 세상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깡통과 싸우는데도 홀로 죽어가는 거짓말 같은 새빨간 진실
그대의 체온은 아직 따뜻하신가?
*영화 <손님>에서 악행을 저지른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촌장의 대사.
—《문장웹진》 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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