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형 시인 / 느낌이 좋은 사람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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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시인 / 느낌이 좋은 사람 봄눈은 바라보는 자의 눈동자에 쌓인다 첼로와 하프를 위한 흰 눈의 낙법(落法) 저 장엄한 서사의 주인공은 봄눈 내리듯 깨끗이 사라지는 이마 자기 발자국 소리를 천둥처럼 듣는 자 나비, 나비의 흰 망령(亡靈)들 찍히는 자의 혼을 들여다보느라 사진 찍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사진작가의 눈 느낌이 좋은 사람과는 밥을 함께 먹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는 너의 이마 위에 봄눈이 내린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계간 『시인시대』 2025년 봄호 발표
권현형 시인 / 몸의 남쪽
실은 머리를 늘 남쪽으로 두고 잠들진 않는다 남쪽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궁한 대로 기원전의 풀과 씨앗이 그득 담겨 있는 가죽 바구니가 있다고 대답했다 녹색이 살아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잔설 때문인지 몸이 차가웠다 눈이 그친 다음 날이었다 남쪽에 가면 좋을 줄 알았건만 무엇보다도 빨리 따뜻해지고 싶었건만
우리는 각자 돌아누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뜻밖에도 경주까지 내려와서 삼월에 몸이 그토록 식을 수 있다니
몸에 갇히면 몸만 남는다 텅 빈 심연에서 꽃을 피워 올려야 하는 산수유의 노랑 고뇌뿐이었다
남쪽에서 남쪽을 그리워하며 아지랑이 같은 납덩이 같은 죄의식에 시달렸다
권현형 시인 / 자벌레는 세계의 그늘을 잰다
원곡동, 스패니시 할렘, 명왕성 힙합 가수는 자신을 탕진했노라고 랩으로 고백하고
자벌레는 몸으로 느릿느릿 세계의 그늘을 잰다
검은 그림 속에 연두 그림 연두 그림 속에 분홍 그림 분홍 그림 속에 자꾸 멀리 가는 사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흐느낌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모두를 위한 것, 깍두기를 먹다가도 너무 모질다고 말하던 사람
나중에 다시 볼 사람 나중에 다시 들을 음악
나중에, 나중에, 라고 말하는 대신 저 산 위에 배를 띄우겠다 비탈진 곳에 구름과 비가 섞여 있다
검은 그림 속에 연두 그림 연두 그림 속에 분홍 그림 분홍 그림 속에 검은 기억은 그림자까지 모질게 살아 있다
권현형 시인 / 밀착(密着)
한때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숨죽여 울곤 했다 서둘러 폭삭 늙어버리고 싶었다 슬픔도 폭삭 늙어버릴 줄 알았다
까무룩 혼절할 듯 높이 나는 새를 향해 셔터를 누르자 해가 툭 떨어진다 사라진 비행기처럼 잔해조차 없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한꺼번에 검어진 섬의 숲을 찍고 그는 카메라 렌즈를 옆으로 돌리며 마음이 어두워서 그런지 검은 풍경이 좋다고 말한다 어둠 속 그의 숲은 열대림처럼 뜨거워 보였다
그래, 나또한 갑자기 늙어버린 풍경이 좋다 어둠이 좋다 누구와도 농도 백 프로로 밀착될 순 없어 누구와도 뼛속까지 하나일 순 없어 골수까지 차오르는 어둠에나 맡길 곳 없는 나를 의탁한다
저 검은 광대무변에나
권현형 시인 / 저 지금 유배가요
고독도로로 이런, 혀가 춤 추는군요 고속도로로 우울한 날엔 오토바이를 타죠 출발라인에 서면 숨이 멎는 듯해요 슬픔은 비트가 강하죠 악기처럼 가슴을 난타하는 엔진 소리
울렁거려요 미칠 것 같아요 몰아 몰아 몰아 금속말을 몰아 저 지금 유배가요 달리는 오토바위 위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사랑이 낯설어져 버리곤 하죠
아예 인생을 자퇴하고 싶은 순간이 당신에게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찾아오겠죠 그 순간 속도의 절정에서
흩어져버릴 거예요 저 공중 한숨처럼 꽃잎처럼
- 詩集 (천년의시작 시인선ㆍ0063)
권현형 시인 / 역광
서울에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 우주 밖의 일인 듯 아득해집니다 저는 지금 고대 왕조의 수도에 와 있습니다
무덤과 사원들이 가까이 살아 있습니다
내리는 곳이 아닌 역(驛)에서 마주친 우연으로 운명으로부터 먼 운명으로 이국의 꽃집 앞을 지날 때
격자 창문 안쪽에서 숨은 눈들이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풍경을 보기 위해 창문이 있는 건 아닙니다 생각을 지우기 위해 풍경을 봅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만 그 뒤에 가려진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부처는 지워지고 부처 손톱이 자라듯 나무가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 뒤에, 뒤에, 우리는 아프게 서 있습니다
권현형 시인 /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내가 기른 비, 내가 기른 햇볕 달콤한 야생 열매가 잔뜩 들어있길 바란다 격자 창문 안쪽에는 죽은 액자나 말린 꽃에 대한 에칭보다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길 바란다
단 것이 필요한 날에는 햇볕을 따라 걷는 게 좋다 올리브 나무를 화분에 기르고 있는 마카롱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게 유일한 행복인 날도 있다 올리브나무와 마카롱 가게가 앱 지도에 좌표로 있다면 잠시 행복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마카롱 가게의 낡은 소파를 흰 옥양목 천으로 덮어씌운 순간 빛이 흰색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흰색 천 커버는 낡은 삶을 뒤집어씌울 때도 있고 죽음을 덮어씌울 때도 있다 행복을 망상하며 햇볕을 따라 걸어본다
막다른 구석, 막다른 삶의 안쪽에는 햇볕을 플라스틱 집게로 겨우 집어 날아가지 않게 빨랫줄에 걸어놓고 있다 젖은 행주가 햇볕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빛이 부족한 골목 안쪽까지 걸어들어와서는 내가 누구인지 잊은 채 악인인지 선인인지 잊은 채 햇볕의 공평, 햇볕의 분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 짧은 산책의 정점은 조명 가게 앞에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와의 조우, 내일 파멸한다 해도 커다란 화분에 심어놓은 사과나무는 힘껏 생을 사랑하고 있다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사과나무의 애착을 내 머리에 옮겨심는다
사과나무는 화분을 뚫고 나가 땅의 일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땅을 망상하고 몽상하는 힘으로 살아갈 것이다 -계간 『녹색평론』 2024년 봄호 발표
권현형 시인 / 귀롱나무는 바람에 홑이불과 같이 마르게 두길*
꿈에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 다친 새를 만났다 손을 내밀자 너무 차갑다고 말했다 방금 손을 씻어서 그래, 구차한 변명으로 참회 없이 반성 없이 계절이 지나간다
새의 아픔을 내가 모를지라도 내 아픔을 새가 모를지라도
구름이 예쁠 때는 믿음이 남아 있을 때 커다란 은회색 나무에서 떨어지는 마른 떡갈나무잎이 잿빛 깃털을 가진 작은 새로 보인다
구름과 새와 나무와 사람은 애초에 혈육 한통속의 씨앗
화분에 물 주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것 화분에 물 주는 소리만 들어도 뇌가 맑아지는 것 자기 연민이라기보다 생애주기가 식물에 가까이 있을 때 다시 밥 냄새가 살아 있는 골목으로 돌아갈 때
플라스틱으로 만든 월경대 생애의 비밀은 나의 비밀 구름과 새와 나무의 태반이 오래전 병들었다고 한다 아침마다 천변을 달리는 얼굴을 감싸주었던 바람의 감미로운 손
만들지 않은 손을 은인처럼 기억한다 귀롱나무를 바람에 홑이불과 같이 마르도록 두는 길은 깊이 물든 몰락을 지우는 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계간 『생명과문학』 2025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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