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체 시인 / 태엽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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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체 시인 / 태엽
화염의 번식은 사물의 몫이다
돌멩이들은 공백이어야 무방하다
첼로가 눈사람에게 순례의 말로에는 풍화되지 않을 암석만 모래로 분장한 채 고고하게 앉아 있다
혁대를 두른 동물인형들이 휘둥그레 눈 뜨고 잔다
사랑이 횡포를 부리던 지옥
뭍은 푸석푸석할 수 밖에 없다
여우들이 어두운 숲의 밤을 쓸고 다닌다
가장 마지막으로 꾸게 될 꿈을 예고 받은 신탁처럼
이이체 시인 / 낭만주의
벌거벗은 자들의 사막 깨진 달에서 다른 어둠이 발견되었다
타오르는 자화상을 가진 모래들은 형형하게 식어 보드라웠다 독을 뺏긴 뱀이 비단결 같은 모래 위를 지나가며 비단길을 만들고 있었다
음유시인들은 하늘을 향해 웃지만 그들의 밤에는 오직 기계만이 가득할 뿐* 모랫길 위로 연기가 흐드러진 달빛을 따라 흘렀다 벌거숭이들은 천사를 꿈꿨으며 질 낮은 낭만이 태양의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이미 깨져 버린 달은 충혈된 눈 그림자가 고향을 찾지 못해 물었다
*그들의 밤에는 오직 기계만이 가득할 뿐 : Allen Ginsberg, 「Howl」 중에서
이이체 시인 / 채식주의자들
감각을 격리시킨 채로 이야기한다. 내가 이끼 낀 문명에서 태어났을 즈음이었다. 알을 못 낳는 암탉들이 속된 사랑에 감염되었다. 문지기는 뇌쇄적인 실연괴물, 쾌락과 타락을 음미하느라 밤색 머리의 처녀를 잊지 못한다. 성년식, 술에 취해 옷을 반쯤 벗어젖히곤 이단異端하듯 놀아나던 촌뜨기들. 쥐덫의 둘레를, 괴혈병 걸린 고양이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돌았다. 늦가을 들판에 우거져 있던 낯선 색깔들이 성가진 무연처럼 자꾸 눈에 거슬렸다. 그대들은 내일 미끼로부터 배척되어라. 거물을 상실 당한 쌍둥이형제들은 서로를 탐했다. 때로 문지기는 자신의 가면 쓴 얼굴을 곡예라고 곡해했다. 유형은 치명적이었으므로, 들판에는 망원경으로도 풍요로물 차례가 오지 않았다. 흔적보다 더 진한 외상을 찾고 있다. 똥파리들이 닭장의 마디마디에 맺혀 있었다. 변성기 갓 지난 아이들은 출혈이 멎지 않자 통곡했다. 나는 풍향계를 믿어 본 적이 없다.
이이체 시인 / 종말론
입술이 없는 묵언을 새겨듣는다. 혼(魂)이 휘청거리자 삶은 조금 기운다. 사람의 마들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수록 미래가 조금씩 흔들린다. 과거는 거짓말의 전복이고 반복이다. 모두 사라 지는 풍경화, 말이 생경한 종이들은 모두 의미에 대하여 제사를 지낼 것이다. 손바닥에 총구를 겨눈 절망이 장전된다. 진심을 전하고서야 비울 수 있는 무심이 채워진다. 생전으로 후퇴하지 못한 갖가지 주술들이 세계에서 종적을 감춘다. 열기는 온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온도의 분위 기에 의한 것이다. 부모로부터 훔쳐온 삶을 간증한다. 금욕물 타작하는 사람들을 불경하게 여기 는, 방아쇠 당기지 않은 흉기만이, 무한(無限)을 걸어서 미궁을 건설할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저의 가 있다. 잊다.
이이체 시인 / 살아남은 애인들을 위한 노래
한번의 연애가 끝나자 한편의 시가 완성된다 당신을 필사해온 내 미력의 최후 모든 외마디는 명멸한다 돌아오지 않는 폐곡선, 오늘은 누구라도 나를 조심했으면 좋겠다
상처는 녹슨 뼈에 새겨지는 방식으로 남겨진다 필름이 끝나는 소리가 난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나는 곁에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남겨지는 거지 아무런 감흥도 없이 입에서 귀로 흘러들어가는 종언 나는 당신을 저주하는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날짐승들은 흙을 더 많이 기억한다 부르튼 눈동자로 보는, 푸르지 않은 수평선 모두 잊고 태워버린 시집에는 완벽하게 윤색된 기억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거짓말들로 꾸려진 가구들은 언어의 공백을 감정하느라 사무치도록 흉측했을 것이다 오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오해하는
아무 이유 없이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버려진 퍼즐 한조각 같은 불구로 남기를 당신보다 당신의 비밀을 사랑해요 사랑의 애인이란 그토록 외로이 무능하다 처절하고 치졸하다 연애, 가장 소원한 애무는 위로받는 일 타인이 쓰고 간 축축해진 칫솔을 다시 쓰면서
때로, 만나본 적 없는 소문이 나를 살해한다 창가에서 상념과 함께 블그스름하게 젖어드는 육신을 위해 날개를 만들 것이다 촛놈을 녹여 만든........ 어떤 애인은 살아서도 방치되는 의미에 가깝다. 당신의 뼈를 잊지 않을게요 부둥켜안아도 만질 수 없던 그 내부의 울림을 입술들을 다시 모아 붙이면 침묵을 폭로하던 홀몸이 부서질 것이다 어떤 익명이 나를 안으면 그 이름이 되겠다
윤회의 집에 이르러, 불살랐던 시집들이 낳은 잿더미가 뿌옇게 바닥을 지배하고 있다 당신은 내 심장을 기억해주시겠습니까 가면들은 저마다 자신을 풍자한 언어에 불과할 뿐 제 몸이 아픈 줄 모르고 떠났다가 죽어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통증을 얻으러 나선 전쟁터에서 수레 가득 주워온 죽음들끼리 서로 부대낀다 저 무일푼의 생애들을 현생에 초대된 적 없는 연애로 봐도 될까 나는 당신이 버리지 않는 시구로만 독해되겠다 비유로부터 빌려온 애인이 헐벗은 습성을 보채고 있다 몇가지 다른 종류의 침묵들이 갖고 싶어지는 순간 문 열린 독방에서 나가지 않는다
이이체 시인 / 한량들 -우리들에게
우리는 늘 다쳤다. 어디에도 눕지 않은 채로 상처를 안고 흐느낄 수 있었다. 식욕도 느껴지지 않게 하는, 진흙탕 속 엉망진창의 엉터리 기억들. 세상 모든 파편들을 풍경으로 얻어가도 배부를 수 없었다. 행복해라.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없었고 무리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기억이라는 동화 속에서 읽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부담 사랑이 어울리지 않는 연인들.
우리들은 서로의 눈을 읽으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며 괴로워했다.
입맛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풍족한 소문이었지만, 사람들 사이를 오고 간다는 걸 제외하곤 꿈보다도 못했다. 우리는 노상 떠나갔고, 떠나왔으며, 상처받아도 돌아올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 세상이 꾸는 악몽 속에서 어느 주검들의 비린내를 몰고 오던, 요절한 부랑아들을 닮아갔다.
상징과 심장. 우리는 늙은 연인들처럼 언제나 서로에게 거울을 보여주며 마주 보고 있었다. 진실한 진술만을 적었던 혈서는 낡고 흐려져 읽을 수 없는 마술수첩 같았다. 한 방울 눈물의 기억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적. 숫자가 매겨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넘기며 우리는 소스라치듯 자지러졌다. 우리는 예전에 더 잘 미끄러졌는데, 쉽지 않은 자세를 잡기까지, 신중하고 다소 답답한 걸음으로 걷기까지, 볼 것들이 없어도 막상 보면 못 볼 것을 보게 되었다. 더러운 결벽 이었다.
안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어느 망각들. 보기 위해 눈 감고 입을 다무는 순간순간들.
연인들은 그림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햇빛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구걸하지도 않았다.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무게가 필요했고, 우리는 가벼웠다. 방황이 우리에게 가야 할 방향을 물을 때, 풍경들은 모조리 눈물의 바깥에 있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들'은 나와 너와 너희에게, '우리들'이라고 하면 너와 나 말고도 누군가 더 있다고 느껴진다
이이체 시인 /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잊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
연꽃 아래서 피어나는 주검
무너진 밤은 밝고, 설익은 해는 색을 지운다 어제 태어난 잠이 오늘 눈 뜬다
어떤 우주에서만 흐르지 않는 숨이 있었다
저무는 눈가에는 누군가가 등불 없이 스산하게 잦아든다
풀꽃들이 암수를 알 수 없는 음양을 가졌다
향을 피우지 않고 춤추는 여승들과 폐허 폐허 폐허의 허물
도시는 허물을 벗고 기어 다니고 있는 것
어느 길에서든 간단하게 헤매면서, 누구도 시린 눈을 죽일 수 없었다
나무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숲 칼의 뼈
흉터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는 색을 보듬고
이형(異形)의 인생이 마르지 않는 강가에 이르러 눈을 씻는다
피와 눈물
피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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