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효환 시인 / 한 사람을 보내다 외 5편
|
곽효환 시인 / 한 사람을 보내다
지난 여름, 한 사람을 보냈다 오랫동안 사랑했으나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부비고 더러는 행이었고 더러는 불행이었던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던 그를 보내고 오랫동안 아팠다
그 여름은 늦게가지 무더웠고 잠시 가물었다가 지리하게 많은 비를 뿌렸다 그리고 두 개의 태풍이 하루차이로 지나갔다 그 흔적은 폐허였다
그 여름 초입, 라오스 국경마을에서 만난 맨발의 아이들 얼굴이 내내 어른거렸다
곽효환 시인 / 그날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곽효환 시인 / 부자마을에 들다
차고 넘치는 고요와 적막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사는 산촌마을에 들었다 수백 년은 넘었을 굵은 나무들 빽빽하고 이끼 가득한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 가득하다 울울창창한 산과 산 사이 협곡으로 난 임도의 흔적을 품은 지도에 없는 길을 따라 걸으며 밀물처럼 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이곳에 머무르고 다녀간 삶을 더듬는다
귀틀집 짓고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 산판길 따라 오르내리던 벌목부들 탄광주변을 북적이던 탄부와 식솔과 장사치들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산짐승 소리만이 간간히 정적을 깨는 오솔길이었다가 산판길이었다가 임도였다가 간신히 길의 흔적을 유지하는 어디쯤에서 홀로 둥불 밝히고 살았을 혹은 그렇게 살고 있을 사람들만이 누리는 마르지 않는 풍요를 생각한다
비워도 비워내도 다시 차오르는 적적한 쓸쓸함과 외로움을 그것이 빚어내는 단정한 그리움과 말간 슬픔을
-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 '신작특집'에서
곽효환 시인 / 깊은 잠 그리고 기억의 방*
깊은 잠에 든 기억의 방 이름과 생몰연도만 있는 더러는 아직 몰연도가 없는 주름 가득한 백발의 소녀들 수줍게 미소를 머금고 비로소 깊은 잠에 들어있다 꿈 많은 소녀이고 아리따운 처녀였으나 제국과 전쟁의 위안부가 되어버린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어느새 먼 별이 되어 하나둘 스러지는 고단하고 아슬아슬한 생을 산 그네들은 정작 자신의 잠든 모습을 보지 못한다 죽음에 맞닿은 깊은 잠과 수인囚人의 시간으로 가득한 기억의 방 그 주름진 붉은 얼굴들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면서 발길을 돌리지도 못하면서 서성인다 오래도록 서성인다 애써 기억을 밀어내려 하고 끝까지 그 기억을 지키려 하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잠들지 못하는 깊고 시린 밤하늘을 지키는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뜬 맹견猛犬 앞에 서서 생각한다 치미는 슬픔은 감출 수 없는 분노는 그리고 애도는 누구의 몫일까
*이인혜 개인전 <깊은 잠 그리고 기억의 방>, 2024. 3. 6~19. 갤러리 인사아트.
-계간 『애지』 2024년 겨울호 발표
곽효환 시인 / 안부
어느 날, 오래전 당신에게서 안부를 묻는 메일이 왔습니다 광화문 근처를 지나며 문득 생각이 났다지요 아주 가끔씩 생각나는 나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며 아주 가끔 잊지 않고 있다며 수줍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여전히 출근하면 녹차를 마시며 찰떡을 먹고 메일을 읽고 신문을 펼치느냐고 덤덤하게 사소한 안부를 묻는 당신 나는 늘 한 발짝 늦게 깨닫고 하여 서툴게 서두릅니다 몇 번을 썼다 지우고 다시 썼다 지워도 나의 말은 맴돌고 나의 문장은 여전히 상투적이어서 '아주'와 '가끔' 사이의 경계를 혹은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다시 당신은 소식이 없고 나는 다시 한없는 기다림으로 서성이다 전에 그랬듯이 시들거나 비켜가려나 봅니다 밤새 세찬 비바람 불더니 풍경처럼 가을이 왔습니다
곽효환 시인 / 야간열차에서 만난 사람
여수행 전라선 마지막 열차 자정을 앞둔 밤 열차는 우울하다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을 지나 자리를 찾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긴 숨을 내뿜고 나면 일정한 간격으로 덜그럭거리며 출렁이는 리듬을 따라 차창 밖으로 불빛이 흘러간다 강을 건너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야경들, 틈새가 없다 문득 창밖으로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낯선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 곧 물을 것만 같은데 정작 말이 없다 흘러간 불빛만큼이나 아득한 지난날들에서 누군가를 찾는데 없다 나도 그도 아무도 없다 문득 대전역에서 뜀박질하며 뜨거운 우동 국물이 먹고 싶다 옛날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