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윤훈 시인(평택) / 휘어진 시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6. 08:00
이윤훈 시인(평택) / 휘어진 시간

이윤훈 시인(평택) / 휘어진 시간

 

 

내 힘은 구부러진 곳에 있다

 

이곳은

화살처럼 튕겨나가는 이들의 순례지

유성처럼 불꽃을 튀기는 이들의 성지

 

보라, 지금 저기

원목을 메고 씩 씩 달려오는 이를

 

내 허리를 돌아

아슬아슬

죽음을 만끽할 것이다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천년의시작

 

 


 

 

이윤훈 시인(평택) / 고공식사

 

 

불멸

거미가 가진 가장 슬픈 꿈

그러나 불멸

허공 높은 곳 거미가 집을 짓는 까닭

 

오랜 침묵 끝

날것들의 비상을 거머쥐고

오찬을 누리는 거미

날것의 죽음을 다시 빛실로 뽑는다

 

잡히지 않는 바람

그것을 자유로이 두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텅빈집

 

아침 천 개의 이슬이 눈을 뜨는

찬연한 그러나 불멸을 위해

허물어야 하는 집

 

이 적막한 눈부심 속의

고공식사

 

어쩔 수 없는 거미의 슬픈 작업

거미의 흔들리는 높이다

 

 


 

 

이윤훈 시인(평택) /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거예요

-궁극적 실체에 관한 구름의 말

 

 

#마술

 

모자를 벗으며 살짝 인사를 하고 텅 빈 모자 안에서 마음먹은 대로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는 마술사

 

그대는 방금 무엇을 보았나요?

-비둘기, 토끼, 장미?

 

텅 빈 모자를 쓰고 입에 초승달을 물고 마술처럼 사라지는 마술사

 

그대는 방금 무엇을 보았나요?

-평화, 선, 사랑?

-전쟁, 악, 증오?

 

 

#페르소나

 

차고 맑은 거울을 마주하여 비로소 목덜미에 곤두선 불안을 쓰다듬고 다독이는 그녀

 

붉은 손톱으로 시간에 맞서 끝없이 자신의 얼굴을 찾으려는

 

천의 얼굴이 다 그녀라는 것을, 그 천의 어느 얼굴도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막, 거울 속으로 들어서는

 

긴 손톱이 더욱 짙붉고 예리한

 

 

#理에 대한 헛된 고찰

 

반죽한 흙덩이 속으로 스미는 아이, 숨을 쉬기 시작하자 말랑말랑 살아 움직이는 반죽

 

흙덩이를 주무르며 또 헛되이 생각을 반죽하고 그 안을 열어보는 사내

 

흙덩이 속에서 나와 자신이 빚은 새와 같이 노는 아이,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그 안을 서성이는 사내

 

 


 

 

이윤훈 시인(평택) / 생의 볼륨

 

 

소낙비 내리고 물오른 알몸, 탱고의 음표예요

 

살아있음을 참지 못해 바람구두를 신어요

 

발꿈치에 매발톱이 돋아요

 

춤추는 붉은 드레스, 활짝 핀 함박꽃이에요

 

숨이 찬 바이올린 네 줄, 끊어질 듯, 질, 듯

 

아, 생의 볼륨을 높여요 포플러나무 끝까지

 

 


 

 

이윤훈 시인(평택) / 파멸을 탐하다

 

 

텃밭의 자두나무는 내게 나무 그 이상의 것

 

가지가 휘도록 달린 것들이

빛의 변주 속에 커 가기 시작하면

하늘 가까이 달린 것은 내게 늘 그리움 같은 것

 

몇몇은 서둘러 풋것을 따가고

몇몇은 손에 닿는 것을 입에 넣고

 

대나무 장대를 벗어난 것은

날개 달린 풍뎅이나 찌르레기들의 오찬

 

높은 바람을 삼키고 검붉을 대로 붉은

농익은 끝

두려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린 그

탐스러운 것

 

이른 아침 나는

나무 밑 이슬 젖은 풀 속을 더듬어

가슴 떨림으로 그 파멸을 탐했다

 

-시집 <생의 볼륨을 높여요> 문학의전당

 

 


 

 

이윤훈 시인(평택) / 청춘

 

 

가만히 서 있으면 한 쪽으로 기울어 불안하다

 

달릴 때서야 비로소 평형을 이뤄

바람의 날개가 솟고 심장이 뛴다

 

가파를수록 힘을 느끼는

위태로운 길

죽음이 표시되어있지 않은 이정표

 

내 안의 해와 달이 힘차게 돈다

펄펄 죽음이 살아있다

 

 


 

 

이윤훈 시인(평택) / 등부터 겨울이 온다

 

 

등부터 겨울이 온다

반쯤 열린 뒷문의 귀가

마른풀살랑이는 산그늘 쪽으로 기울고

웅덩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그대의 등이 설핏 보였을 때 그곳이

그대의 속울음이 고였던 자리라는 걸

나의 벽지라는 걸

시린 등으로 알았다

그대 없어 등이 더 어둡고 시리다

뒷문 곁 강아지 등에 손을 얹는다

앞산 뒤켠으로 아직 남은 빛이 환하다

한때 비겁하게 비수를 감춘 적이 있다

내 등에 통증이 왔다

내 등이 얼마나 가파른지

지나는 바람이 일러주었다

가끔 내 등에서 벌레 먹은 가랑잎이 서적인다

이제 쓸쓸한 등으로 나를 다 보이고 싶다

어둠이 오고 저마다 제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군불을 지펴 지붕 위로 순한 연기를 피워 올려야겠다

겨우내 그대의 등에 곤히 등을 대야겠다

 

 


 

이윤훈 시인(평택)

1960년 경기도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 2014년 천강문학상. 2018년 나혜석 문학상 수상. 현재 중국 한림국제학교에서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