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영민 시인 / 철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6. 08:00
고영민 시인 / 철심

고영민 시인 / 철심

 

 

유골을 받으러

식구들은 수골실로 모였다

 

철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쇄사가 물었다

 

오빠 어릴 때 경운기에서 떨어져

다리 수술했잖아, 엄마

 

엄마 또 운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분쇄사는 천천히

철심을 골라냈다

 

 


 

 

고영민 시인 / 민박

 

 

바람도 없는데 시든 수숫대 허리가

 

소리도 없이 꺾어진다

 

점봉산 고갯마루 너머 하늘을 타고

 

황조롱이 한 마리가 높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마루 끝에 잠시 허리를 내렸다

 

민드름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로며 상강도 머지않았다

 

강기슭의 들국화 밭엔 기러기 울음이

 

종잇장처럼 나릴 것이다

 

용화사의 젊은 벙어리 스님이

 

햇살을 등지고 구절초를 달이는지

 

저녁 바람이 쓰다

 

이유 없이 또 눈물이 나왔다

 

 


 

 

고영민 시인 /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한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 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고영민 시인 / 적막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 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

 

 


 

 

고영민 시인 /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 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 산비알 : 산비탈의 충청도 방언

 

- 시선집〈유리병 편지〉나라말 -

 

 


 

 

고영민 시인 / 평상

 

 

  볼일을 보려고

  읽던 책을 잠깐 평상에 내려 놓았는데

  휘리릭, 바람이 읽던 책을 반을 읽고 간다

  삼복에 끙끙 오기로 잡고 있던

  왕필본 老子 한권을 침도 묻히지 않고

  단숨에 반을 읽어 넘겨 버렸다

 

  책장 넘기는 것을 서서 지켜본다 휘릭, 휘릭

  더 이상 章이 넘겨지지 않는다

  뻔하다는 걸까

  나무 아래 매미 소리만 無爲하다

  불가슴에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켜고

  읽던 쪽을 찾아 가만히 책을 엎어놓았다

  한 평 공터,

  널평상 같은 하늘 아래

  수수머리가 간당거린다

  붓자루 같은 미루나무 끝이 논다

  책따위가 무슨 재미랴,

  바람아

 

 


 

 

고영민 시인 / 하류

 

 

갱조개를 잡던 아이가

입에 손을 대고 허리 굽혀 웃었다

산그림자가 검은 노를 저어

천천히 강을 건너고

징검다리엔 한 계집아이가

치마로 제 다리를 폭 싸맨 채

웅크리고 앉아 느릿느릿 오는 검은 배 한 척을

기다리네

어둠이 깃들어 스스로 가라앉은 강물 속

은어떼가 산다는

뒷산에서는

반쯤 몸을 담근

떠내려온

쑥국새 우는 소리

 

 


 

고영민 시인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 『봄의 정치』. 박재삼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