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아 시인 / 아버지의 정원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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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아 시인 / 아버지의 정원 아버지 그만 상자에서 나와 주세요 구름사다리 타고 사과꽃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남산동 골목으로 갈 거야 산들바람에 인공호흡기가 꿈틀거려도 오르막 햇살에 뒤척이는 빛깔들을 만나고 싶어 숲 구늘의 전설과 새소리의 평화와 연초록 입수들, 당신과 함께 오솔길을 걷고 싶어 광활한 세렝게티가 아녀도 비풍초 똥팔사가 있는 정원이지 버드나무 아래 우산을 쓴 비광 '오노도후'에게 말을 좀 붙어볼까 소나무에 걸터앉은 학에게 뭐 좋은 소식 없냐고 벼락처럼 다그쳐 보다가 푸드덕거리는 고도리를 바라보며 손짓을 해보다가 푸른 초원에 싸리나무 멧돼지 사냥이라도 얻어걸리는 날엔 이내 무릎을 치며 추임새를 넣었다가, 오동나무 똥쌍피에 돈벼락이라도 맞는 운세인지 싱글벙글 엉덩이를 실룩거리다가 홍단풍 그늘 아래 외로운 사슴 한 마리 저승길을 점치기라도 했는지 향기 나지 않는 모란꽃 앞에서 또 한참 동안 심각해지다가 꾸드덕거리는 틀니처럼 흔들거리다가 휘청대다가 삶이 상자 속 몸부림이란 걸 알고 계셨을까 눈발이 그치고 매화가 피던 날 그렇게 가실 줄 알았을까 -<열린시학> 2022, 겨울호
강경아 시인 / 귀향(歸鄕)
성난 국토(國土)의 얼굴을 하고 그렇게 벼리고 벼리다가 조선의 낫이 되어 칼춤을 췄던 그가 식칼이 되었던 그가 갈라진 마른 땅의 보혈(寶血)로 자유의 흙 가슴이 되어 풀꽃처럼 돌아왔다
온 대지에 풀씨가 되어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애달픈 일이냐 얼마나 지독한 일이냐 풀잎에 베어 본 사람들은 안다 부서지는 꽃일에 찔려본 사람들은 안다
흰 무명 소맷자락 깃발처럼 휘저으며 스스로 타오르다 눈물이 되어버린 그가 죽곡면 원달리 들꽃이 되었다 그리움도 기울어 달빛으로 쏟아지는 밤 저 태일입니다 어머니
강경아 시인 / 집으로 가는 길
시화 철수하러 왔습니다
저기, 잠시만요 사업장 방문 전 보안준수사항 점검 완료했나요 별도의 영상 교육 10분을 통과해야 이동할 수 있습니다 주민등록증 제시, 개인정보 활용 동의는 물론,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본관으로 입장할 수 있어요 기업 총수 동상이 있는 1층 로비로 가세요 어······, 안 돼요, 슬리퍼는 안 돼요 CCTV가 보고 있잖아요
까다로운 보안벽을 뚫고 들어가니 어, 작품이 부족한데요 아, 몇 작품은 2층 카페에 전시했어요 거기는 보안 때문에 출입할 수가 없습니다 ······ 〈오늘도 전태일〉,〈김용호 테러사건〉 특별히 보안관리 대상이 되어 유배된 작품들
허리 굽은 두 노인의 뒷모습이 그려진 지극히 서정적이고 서정적인〈집으로 가는 길〉은 영문도 모른 채 삼엄한 보안 속으로 함께 끌려 나갔다
전시 취지에 맞지 않는 작품은 선별하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예술작품을 검열하는 데가 있냐며 큰소리 뻥뻥**기업의 자존심을 구겨놨던 터라 권위와 체면은 살려야겠다는 꼼수의 자구책이리라
노동자들을 규합해 선동하고 파업으로 결국 〈집으로 가는 길〉이 생길까봐 두려웠던 것인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작품들로 한참 골똘해지는 것인데
진땀을 빼며 철거한 시화들을 실고 있는 승용차 뒤로 벤츠 한 대가 우왁스럽게 밀고 들어오며 빵빵거린다
차 빼세요!
강경아 시인 / 어느 토끼의 겨울밤
학다리 오일장에 다녀오신다더니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시지 않아요 영산포 나룻배는 잘 건너셨을까요 흰 눈 펑펑 쏟아지는데 먼 길을 어찌 오가시려는지요 문밖을 한참 서성여요 언 발가락을 종종거리며 깡충깡충 뛰어요 또다시 마중 나가려는데 두 살배기 동생이 칭얼대며 울먹여요 나도 덩달아 눈이 벌겋게 부풀어 올라요 굶주린 소리를 어르고 달래요 그리움도 별빛으로 물이 드는데 엄마는 오시지 않고 문풍지가 방문을 때리며 다그쳐도 쫑긋쫑긋 자꾸만 자라나는 귀, 바싹바싹 마른 귀, 오도독오도독 고드름 같은 귀, 삐쭉삐쭉 날이 서는 귀, 몰아치는 눈보라에 먹먹해진 귀, 찬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토끼 네 마리,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네요
아이, 영순아, 영순아 저 멀리 희미하게 들려오네 울엄마 오시는 소리 들려오네 서른두 살 과부인생, 살아보겠다고 휘날리는 눈보라 앞세우며 장사 밑천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돌아오시네 미끄러질세라 고무신을 꽁꽁 동여맨 나일론 끈이 다 풀어진 채, 손을 흔드시네. 홀로 차가운 눈밭을 깡충깡충 걸어오시듯 내게로 오시네 따스한 장작불 같던 온기는 어디로 가고 차디찬 링거를 달고 오시네 흰 눈 지그시 밟으시며 돌아오시네 열네 살 내 유년의 속살을 찢고 고통으로 오시네 남은 모든 생(生)이 전이된 채, 내게로 오시네 문풍지처럼 떨고 있는 나를 보시며 손을 흔드시네 손을 흔드시네
-『시에티카』 2020년 상반기호
강경아 시인 / 여수
첫사랑을 닮은 바다 풍경처럼 적막이 사무치면 바다가 되었다 좌석에 꽂혀 있는 여행 잡지처럼 펼쳐보지 못한 계절처럼 잠깐 동안의 온기 한 줌의 햇살과 바람, 구름 물빛을 닮은 고요의 풍경이 좋았다 설익은 빛깔이 거칠어서 좋은 생의 어긋난 통점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곳 가슴 먹먹하도록 당신이 그리울 때 변방의 아랫목처럼 깊고도 푸른 여수, 여수로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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