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성 시인 / 아무도 울지 않는다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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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길성 시인 / 아무도 울지 않는다
피리는 스스로 울 줄 안다 사람이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세상 모든 악기들은 가장 잘 울 줄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꽃들도 울 줄을 안다 소월이 가르쳐 주고 갔다 풀들도 울 줄을 안다 김수영이 가르쳐 주고 갔다 바람이 대숲에서 눈시울 붉히고 있다 이제 누가 우리에게 울음을 가르쳐 줄 것인가
조길성 시인 / 모시이불
석유등잔이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모시이불을 깁고 계시던 할머니 밤의 고요는 너무나 단단해서 바늘로 찌르고 깁고 홀쳐보아도 골무를 뒤집어 쓴 채 꼼짝도 안했다 미국에 간 아버지는 몇 년 째 소식이 없고 할머니와 내가 취로사업에서 돌아 온 밤 이었다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모시이불 하얀빛이 서러워 돌아누운 등 뒤로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리를 밟는 것 같았다
조길성 시인 / 두루미는 물가에서 제 그림자를 깊이 들여다보고
소설가 김성동 선생 댁에서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술을 먹어 그렇기도 하지만 말이 거칠어졌다 누군가 내가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은 나더러 억울해야 한다고 나는 우리 조상이 보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대들며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 우겼다 그러던 끝에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선생은 나더러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 했다 영평읍에서도 몇십 리 산골짜기 절터에 집을 지었으니 차도 없이 나올 길이 막막했으나 그 깊은 밤 두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화가 가라앉지를 않아 쌍코피가 흘러내렸다
오늘 산 하나 넘어 다른 집에 묵으며 봉우리 너머를 바라본다
그날 우리는 누구에게 화를 낸 것일까 억울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억울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끝도 없이 내 안에서 싸우는 소리 들린다
조길성 시인 / 바늘
우리 집이 고요했던 때를 안다 바늘을 떨어뜨렸던 때를 바늘은 너무 깊이 떨어져서 아직도 가라앉는 중이다 물소리도 없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해구 일만 천 미터 비티아즈 해연까지 내려간 모양이다 며칠 전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수압을 못 이겨 바늘이 몸 뒤틀며 지르는 신음이었던 것 같다
조길성 시인 / 송아지 눈 속 깊은 우물을 본 적 있니
그 물에 두레박을 내려 달을 길어본 적 있니 그 달을 마시고 꽃을 토해본 적 있니 그 꽃 속에 들어가 한잠 늘어지게 자본 적 있니 그 잠 속에서 꿈을 불러 엄마를 만나본 적 있니 그 품에 안겨 은하 별들을 뚝뚝 흘려본 적 있니
조길성 시인 / 혼자일 때 혼자가 풍부해진다
날씨가 완장을 찼는지 제멋대로입니다 한나절에 사계절이 두루 다녀가십니다 주서식지를 떠나 사람으로부터는 퇴근하지 마시길
줄거리 보다 양념이 더 많은 이야기를 지닌 몽땅 실패한 사랑의 작대기가 눈에서 고름을 짜내며 갑니다 피가 농약인 여자 누구에게도 쏟아질 수 없고 누구에게도 수혈할 수 없는 여자가 뜨거운 피에 겨워 깊은 밤 손칼국수를 썰고 있습니다
몹쓸 놈이 듣지도 않는 약을 때마다 팔아먹는 계절입니다 푸른 것들이 수묵화를 부욱 찢으며 돋아나더니 어느새 서리 묻은 옷을 걸치고 오는 계절입니다 지팡이로 툭 치니 꽃들이 깨어난 엊그제가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사라진 뒤에 아무리 뻐꾸기 날려도 대답이 없으니
물 밑에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체 관람 가 극장에서 만날 수는 없었을까요 여기는 심야영화관 홀로 영화를 봅니다 산비둘기 울음에 피가 맺혔어도 그 피에 젖는 이 아무도 없는 영화관 자막에 내리는 빗금 속에서 용비어천가를 듣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나니 얼음 밑으로 뜨거운 것이 흐르는 물속입니다
조길성 시인 / 징검다리 건너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파파리반딧불이 도랑가에 별빛으로 날아 망아지 눈 속처럼 깊은 밤을 부르던 거기 그리운 것들 실어 우체국으로 보내면 명왕성 해왕성 징검다리 건너 고향집 창가에 갈 수 있을까
삶의 두려움이 긴 그림자 드리우는 창가 어린 나무들 불빛 쪽으로 키를 늘이는데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파파리반딧불이 그렁그렁한 별빛 사이 징검다리 건너 대문을 여는
조길성 시인 /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
녹슬어 못 쓰는 옛 자물통 속에 들어 앉아 은하계를 여행하는 거지가 짜장면 시켜놓고 급한 일로 거처를 비웠다가 오랜만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퉁퉁 불어터진 짜장면을 꺼내먹는다
조율 안 된 별똥별을 밟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혀 잘린 사람이 나무판자를 혀끝에 잇대어 무어라 말하고 있다 딸깍딸깍 별들이 부딪고 있었다
별들은 사악한 놈의 맑은 눈동자 맑은 죽 그릇에 얼비치는 더러운 얼굴들
당나라시인 이하는 내 한 많은 피 무덤 속에서 천년을 푸르리라 했다 이 땅에 뿌려진 피는 방사능 보다 더 오래도록 푸를 것이다 빛나는 걸레 나부끼는 국가보안법 다 식은 주전자가 마지막 숨을 토하는 밤이다
주인이 찾지 않는 분실물들은 모여 앉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하고
오늘은 등뼈에서 핏물을 뺐다 몇 글자나 적을 수 있을까 어제는 안구에서 먹물을 뺐다 내일은 무릎에서 고름을 빼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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