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정남 시인 / 미지근에 대하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7. 08:00
박정남 시인 / 미지근에 대하여

박정남 시인 / 미지근에 대하여

 

 

국수를 주문하는데

전원이 다 미지근한 국수가 좋다고 해

미지근을 시켜놓고 보니

이 모임 참, 미지근해서 오래간다 싶다

생각하니 다다음달이 벌써 10주년이 되는 달이다

미지근이 미덕이 되었으니

이젠 이름 하나쯤 가져도 좋겠다는 제안에

누군가 미지근으로 하자고 하여

웃으며 결정을 보았다

이름 하나 얻는 데도 장장 10년이 흘렀으니

그 뿌리도 참, 미지근하게 깊다

 

미지근해서 술술 잘 넘어가는 국수에

국물까지 두 손으로 받쳐들고 단숨에 들이켜자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어느덧 남쪽 산에선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다

미지근하게 끓어오르는 정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곰곰 생각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저 바다는

단절이 아닌

미(美)와 지(知)에 뿌리(根)를 박았던 것

한결같은 그 마음 위로

미지근한 달빛이 요요하기만 하다

 

- 월간 《현대시학》 2014년 3월호

 

 


 

 

박정남 시인 / 몽실언니

 안동을 떠나오며 꺼내본 부재중 전화 한통에는 안동 조탑리를 꼭 찾아보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저곳이 조탑리인지 조팝리인지 온 들이 조팝꽃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마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권정생 선생이 종지기 하던 교회가 보이고 댕그랑댕그랑 종소리가 운다 들 가운데 단아한 5층 전탑 하나가 모양을 드러낸다 누가 찾아오면 선생은 옆구리에 불편한 오줌통을 차고 집 뒤 골짜기로 숨어들었다지만 마을 뒤쪽 생이 집 옆 작은 집은 보이지도 않고 수돗가에 앵두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 몽실언니가 친정 와서 물 한 그릇을 떠서 아버지께 바치듯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시집 『꽃을 물었다』 (문학의전당, 2014)

 

 


 

 

박정남 시인 / 사랑은 끝말잇기와 같아서

 

 

사랑은 끝말잇기와 같아서

슬픔과 아픔 같은 울증의 감정은 물론

기쁨과 미쁨 같은 조증의 감정도 숨겨야 해

어설픈 코스튬을 흉내 내서도 안 되지

새벽녘이나 저물녘은 피아 구분이 어려우니

조심 또 조심하고

붉은 제라늄은 독초라는 것을 명심하고

라듐이나 이리듐 같은 맹독은 더더욱 피해야 하지

사랑은 끝말잇기와 같아서

필사적으로 피하려 해도 언젠가는

금기의 단어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차오르다가

어느새 슬픔으로 치다를 테니

파국을 피해 종횡을 누빈다 한들

마침내 픔과 쁨과 튬과 듐과 늄 그리고 녘이라는

외통수에 다다르는 것이니

그것이 사랑이라는 끝말잇기의 숙명이지

하지만 애인아

절망할 이유는 없어

사랑은 끝말잇기와 같아서

둘뿐 아니라 셋도 넷도 가능하니까

내일 또 누군가를 만나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박정남 시인 / 비

 

맑은 날의 그 고운 머리결을

하염없이 운다.

나들이옷을 입고.

비는 산사의 탑을 적시고

돌을 적시고

이윽고 가을로 가을로

하강한다.

나뭇잎을 적시고

들판을 적시고

메뚜기의 살찐 종아리를 적신다.

마을을 들어서면서

비는 주춤한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단장하고

오, 무지개

천사의 핀이 잠시 빛난다.

 

-시집 <숯검정이 여자>에서

 

 


 

 

박정남 시인 / 내 영혼에 집채 만한 어둠을 찍고

 

한 두어 개 노오란 산수유꽃이나 흔들리는

이른 봄, 골짝을 내려 오다가

물이 쉬 빠지지 않는

마른 풀잎사귀들도 걸려 있는

골짝물의 펑퍼짐한 양지 바른

자리에서

나는 또 쏟아 놓은 끈끈한 액체더미의 숨쉬는

두꺼비알들을 만나고, 반가움에

거의 본능적으로 그 검은 반점들을

손바닥에 얹어 보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보다도 더 날쌔게

침략자의 손등을 할퀴고

네 다리를 벌려 쏟아 놓은 끈끈한 액체의 알들을 싸는

눈이 부리부리한 못 생긴

누런 두꺼비 한 마리.

나는 쫓겨 나와서

다시는 치유할 수 없는

내 영혼에 집채 만한 어둠을 찍고

작은 지푸라기 하나 얹어주고

급하게 골짝을 내려왔다.

 

-시집 <숯검정이 여자>에서

 

 


 

 

박정남 시인 / 초하初夏

 

간밤 비에

머리 감은 밀밭이

뽕나무밭 머리에서

검게 물결치고

런닝 샤쓰를 입은 마을 아이들이

오디 따 먹은 검은 입으로

밭두렁길을 내려 온다.

개울가에 나와

비인 사이다병에 한 무더기 붉은

산나리꽃을 꽂고

한참이나 물밑 조약돌을 잊고 있는

처녀에게

머언 뻐국새, 젖은 자리의 짙푸른

산이 내려와

철철 울음을 쏟아 놓는다.

흰 거품 떠 가는

골짝물에, 걷어 올린 고무치마

허벅지 담그고 머리감는

발바닥이 짙푸른, 아낙들의 겨드랑의 땀

햇볕 속에 짜고 달게

섞이고 있다.


박정남 시인 / 지렁이 2

 

장마 끝의 강렬한 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아이들이 빙 둘러 서 있다.

개미들 어지럽게 땅 위를 기어가고,

빗줄기 따라 끝없이 헤엄쳐 가는 목욕 나왔다가

미처 돌아가지 못한 지렁이 한 마리가

아이들에 빙 둘러싸여

꿈틀거리고 있다.

제 붉은 몸에 아이들이 던지는

뿌연 흙칠을 하고

숨가쁘게 뒤척인다.

뱀이야, 둘러선 도시 아이들은

뱀이라기도 하고

끝내 작은 돌멩이를 맞고 까맣게 죽어 있는

골목 안 지렁이,

홀로 새까맣게 햇볕에 타들어가서

개미들에 끌려 가고 있다.

장마 끝의 강렬한 햇살 비치고

잡풀과 맨드라미만 제 높은 키의

더운 숨을 들이키고 있다.

 

 


 

박정남 시인

1951년 경북 선산 출생.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숯검정이 여자』 『길은 붉고 따뜻하다』 『이팝나무 길을 가다』 『명자』 『꽃을 물었다』 등. 대구시인협회상, 금복문화상(2005), 이상화시인상(2010) 수상. 현재 대구 효성여고 교사,  대구대학교 강사, 대구시인협회장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