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석 시인 / 초록절벽에 서면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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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석 시인 / 초록절벽에 서면
백운산 휴양림에 들어서면 만장(萬丈)이 넘는 초록 절벽이다 비장한 결심도 없는데
숨이 턱 막히고 저절로 발끝이 모아진다
한 솥이면 도시를 절절 끓게 하던 땡볕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볕들의 블랙홀 초록 잎새마다 햇빛 시체가 눈부시다
바람이 스윽 비질하고 지나가면 살아남은 햇빛 몇 알 후드둑 떨어진다 풀이 푸른 팔을 뻗어 허겁지겁 먹는다
돌연 소나기 한 줄기 몰려온다 점자 읽듯 숲을 읽어가는 수만 개의 손 마음을 죄다 읽힌 나무들이 부르르 떤다
김정석 시인 / 메꽃
다리 잃은 누이가 블럭담 아래 씨를 뿌렸다 여름 한 철 잘 자란 메꽃이 누이에게 담장 밖 풍경을 보여준다
메꽃이 오르는 하늘을 잠자리 떼가 다리미질 한다 하늘이 파랗게 퍼진다
잠자리가 누이의 마음을 물어다 하늘에 뿌린다 점점이 흩어진 꽃씨가 명년 봄에는 연보라 빛으로 담 밖에서도 곱게 피겠다 누이의 얼굴을 세상에게도 보여 주겠다
김정석 시인 / 강경에서 만난 웃음
강경 젓갈 시장, 어리굴젓을 팔던 여자 젓갈통들 나란히 좁은 사이를 지나다 엉덩이가 서로 닿아 둘 다 웃었는데 그 겸연쩍은 웃음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웃음도 충청도에서 태어나면 느리게 물무늬처럼 퍼지나 봅니다 한 웃음이 끝나고 그 웃음의 끝을 지우기도 전에 새 웃음이 태어나는 얼굴 어리굴젓, 명란젓, 새우젓처럼 오래 묵혀도 상하지 않는 삼투압 웃음 그냥 하는 인사에도 젓갈처럼 정이 감겨와서 이 맛 저 맛 볼 것도 없이 웃음맛 하나만으로 젓갈 두 통 사들고 왔답니다 어쩌고 저쩌고 수작을 할 처녀 총각도 아니지만 오는 길 내내 마음이 설레설레 일어서기도 하고 품고 온 웃음이며 말들이 삭아가는지 내 몸에서도 강바람에 곰삭은 젓갈 냄새가 났습니다 또 오라는 인사는 못 듣고 왔어도 강경에 가면 아무래도 젓갈부터 사러갈 것 같습니다
김정석 시인 / 진달래꽃
시인이여 밤새워 목구멍에서 피나도록 그렇게 슬퍼함이 하도 깊어 먼 후일 또 먼 훗날 아쉬운 것들을 달래며 그리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못 잊고 아직 못 다 한 것들이 피맺혀 슬픈 것들이 많아 그리 꽃불을 지펴 번지고 있는가
시인이여 예전 미처 모르고 있던 그 아쉬운 것들이 예전 미처 몰라서 생각하기에 그 안타까운 것들이 멍울에 맺혀 봄날마다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사랑하는 가슴마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고이 묻어 언뜻 생각나는 것들이 그리워서 산 등성이에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이여 아쉬운 것이 많지만 그 못 잊는 가슴마다 진달래가 피듯 말없이 문득 피어나리라
김정석 시인 / 사월
막 초경을 했을까 하는 큰 딸아이 냄새 같은 것을 바람은 들길에 깔았다
찔러 보렴 들찔레 덤불에 굴러보는 산 다람쥐 등에 가시 대신 풀 비린내가 박혔다
웃지 마라 너도 사월에는 뒤 가슴에 풀 비린내만 가득 박아내는 풋사랑이었지 않은가
김정석 시인 / 탱자꽃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사금파리에서 튕겨 나온 햇살
고개를 들어 고개를 들어 말해
탱자꽃 환한 울타리 따라 그 애가 왔다
김정석 시인 / 화장花葬
희디 흰 배꽃은 지는데 어쩌라고 국어사전을 뒤척이고 싶어지는 것이냐 화장(火葬)이란 말 대신 화장(花葬)이란 말이 자꾸 쓰고 싶어지는 것이냐 꽃불이 뒤 몸에 옮겨 붙어야 잉걸불이 되는 것처럼 그전에는 그냥 花葬이라 말하자
저년 미쳤지 그리 하얀 소복을 입고 저리 아무데나 분분히 날리다니 제 몸에 활활거리는 꽃불의 열기 어쩌라고
몰래 지켜보는 花葬
김정석 시인 / 프로그래밍 컨트롤러
프로그래밍 컨트롤러는 수천 개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절벽이다
백만 마리의 펭귄이 제 짝을 찾아가듯 백만 마리의 박쥐가 제 새끼를 찾아가듯 0과 1만 읽고 목표 지점을 찾아간다
1이면 가고 0이면 멈춰라
사람이 알려주는 것은 규칙뿐, 주는 먹이는 5밀리암페어 전류가 전부다
일 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너는 폐회로 안을 빙빙 돌아다닌다 실핏줄처럼 엉킨 길을 찾아낸다 수만 개의 이름을 부른다 수만 개의 물음을 돌려보낸다
못 찾을 것도 못 갈 곳도 없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음 앞에서는 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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