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만 시인 / 망막수술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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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시인 / 망막수술
수십 년을 혹사시켰으니 당연한 처사겠다 건조하고 까칠한 속내를 보이더니 종내는 파업을 시도했다 제 몸을 가르고 피를 토하더니 딱! 문을 닫아 걸은 왼쪽 눈 좌이지만 좌편향도 우편향도 가리지 않고 기울기를 조절해주던 눈 언제나 동등하게 나를 이끌던 네가 조용히 직장을 폐쇄했다 문 닫고 마음 닫은 속 깊은 불만 예고 없이 나를 안개 속으로 밀어 넣은 저항심, 노력봉사에 임금체불까지 겹쳤으니 나로서는 함구무언이다 속절없이 저물었으니 시름만 깊어진다 제 스스로 할복하고 생피를 뿌리며 파업을 시도한 왼쪽 눈, 균형을 잃은 오른쪽 눈이 전력투구한다 그도 아프다
박일만 시인 / 경전
낚시꾼이 수면을 읽는다 물속을 종일 해독하는 중이다 페이지를 수 없이 넘겨도 바닥에 깔린 진리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어 번번이 물고기만 오리무중이다 물빛이 눈부신 건 그 아래에 무수히 많은 표리가 있기 때문일 것인데 무엇 하나 세상에 능통할 혜안도 없고 숨겨져 있는 문장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 얼마나 읽어내야 할 삶인지 이 나이 먹도록 한 줄도 깨달은 게 없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잡고기마저 놓치는 낭패감만 안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응시하는 세상의 물빛 눈부셔! 눈부셔! 그 마저도 제대로 섭렵하지 못하고 온 생을 겉표지만 해독하고 있을 뿐인 나는,
박일만 시인 /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며
자꾸만 기우는 몸을 벽에 세워드리고 등을 민다 구순 넘어 거동 불편하신 아버지 뼈 삭고 근육 무너지는 동안 상처투성이다 가죽 처진 소처럼 늘어진 등판에 무늬가 새겨져있다 강 무늬, 산 무늬, 나무, 돌, 비바람 무늬까지 무수하다 저 등과 어깨로 버텨온 무게가 얼마던가 살을 발라 식솔들 먹여 온 세월 얼마던가 짚고 선 벽은 평생을 두고 맨살로도 넘지 못하신 꿈이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태생으로 돌아가고 계신다 내외하시듯 돌아서 있는 뒤태가 애처롭다 물기를 닦아드려도 또다시 기우는 몸, 아버지 몸에서는 무궁화꽃 향기가 난다 노구를 씻겨드린 밤 꿈속에서 내 팔다리도 가늘어져 갔다
박일만 시인 / 뼈의 속도
시간을 수없이 접었다 펴가며 반듯한 철로에서도 뒤뚱댄다 험준한 산길을 만날 때마다 쉼 없이 허리를 꺾어대야 하는 몸 세상을 건너 시절을 건너 혈을 짚어가면서 뼈를 한 치씩 늘였다 줄여 가면서 종점에서 시작, 늘 종점에서 끝난다 주렁주렁 식솔들에게 등을 내주고 길고 고단하게 달려야만 하는 몸은 태생부터 속도라는 패에 온 생을 걸었다 칸칸이 바람으로 가득한 속도는 뼈의 아비들 삐걱대는 관절을 마디마디 이어 붙인 남루한 골격 달리다 멈출 때마다 허리의 통증은 더해진다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인 줄 알았던 세상 모든 아비들이 가끔 자리 펴고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연유도 속도가 지켜 내는 올곧음 때문. 속도와 한 몸인 아비들 역마다 부려 놓은 허기를 되삼켜 가며 해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전복되지 않으려고 뒤척이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내력, 속도는 세상의 아비들
박일만 시인 / 지구의 저녁 한때 4
애들이 장성한, 이제는 머리 희끗한 나이에 이른 나를 어머니는 여전히 젖살 붙은 애로 보신다 저녁 밥상에 생선 한 토막. 한사코 내 앞에 두신다
괘념치 말고 드시라고 밀쳐 내도 어느새 내 쪽으로 놓여지는 생선 한 토막
보릿고개 넘던 시절을 떠올리시는지 무엇보다 귀한 음식이라 여기시는지 늘그막의 아들이 아직도 어머니는 안쓰러운 것이다
연세는 저녁에 닿아 있으나 마음은 아직 중천에 정박해 계신다
-제가 요즘엔 생선이 영 안 땡겨요 어머니! 재차 밀어 놓는다
네댓 개의 반찬 그릇이 다 비어가도 덩그러니 남는 생선 한 토막
박일만 시인 / 숯
뼛속까지 화기를 받아냈다 검다고 비웃을 것이냐
막막하고 긴 시간 속에서 뜨거움을 통째로 들이 마시고 까마득히 숨을 멈춰야 온전한 생이리라
온몸을 불구덩이에 던지고 누워 치명적으로 견뎌야 다시 숲을 이루는 나무 절정에서 머뭇대다가는 허망한 재가 되고 만다 검다고 거부할 것이냐
달궈진 채 조용히 석탄처럼 깊어진 몸 검을수록 생을 맑은 소리를 품으리라
이 세상에 알몸으로 와 삶의 화탕지옥을 지나고 나면 나의 뼈들도 종내는 저런 색이 되기나 할는지
검다고 버릴 것이냐
박일만 시인 / 상처가 사람의 무늬를 만든다
포경수술을 하고 온 중학교 삼 학년 아들 녀석을 보고 우리 부부는 웃었다 투정과 장난기 덕지덕지 하던 얼굴 온데 간데 없고 제법 근엄한 미륵불 같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소리 없는 등짝을 타고 들바람, 산구름, 눈, 비 들이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빠르게 건너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예전 그 모습 돌아오지 않아 웃었다 녀석,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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