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신혜 시인 / 물집재배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8. 08:00
김신혜 시인 / 물집재배

김신혜 시인 / 물집재배

 

 

물집을 터뜨리지 않으면

물집은 번질 거야

 

번질수록 좋지 누구나 열매를 맺고 싶어 하니깐

열매를 터뜨리고 싶어 하니깐

 

물집이 커질 때까지 기다렸다

물집 옆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방문을 열어놓는다

다른 방문에서 흘러나오는 다른 냄새와

다른 슬픔과 다른 바이러스들이 뭉쳐진다

 

하나의 뿌리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으면

엄마는 식물 곁을 떠나지 못한다

종일 그걸 바라본다

 

나는 종일 터뜨린다

물집을 터뜨리면 기분이 좋아

선물을 포장한 에어캡처럼

터뜨리고 또 터뜨리고

 

다 터져버린 물집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잠든 어린 내가 보였어

 

물집을 잠재우는 법은 모르는데

좀처럼 눈이 떠지질 않았어

 

눈을 비비면

눈동자는 물집으로 변해 있었다

물집 속에 고인 눈물 한 방울

 

안방에서 건너온 할머니가

정수리에서 바늘을 꺼내어

내 눈동자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툭, 터지는 소리

열매가 무르익는다

 

 


 

 

김신혜 시인 / 대관람차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대관람차야

이곳을 환하게 비추지

 

거대한 링이 빛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면

끝없이 회전하는 공동묘지

죽은 사람들은 한 칸씩 저기 묻힌다는데

 

마을 사람들을 전부 실어도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대관람차는 크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한 번쯤 하염없이 올려다보곤 해

 

대관람차 주변에는 유채꽃이 가득하다

진동하는 향기가 진동하는 기계음이

덜컹거림이

자꾸만 나를 아득하게 해

 

어떤 여자는 저 안에서 아기를 낳았대

잠시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없었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대관람차의 되새김질이 시작되면

유채꽃 향과 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느 날 나는 대관람차를 탔지

구름은 거품이 되어 흐르고

거대한 링은 나를 천천히 실어 나르고

 

나는 창문에 기댄 채

대관람차의 품속에 안겨 있었지

이곳에 고여 있는 영혼들은 즐거운 양

나를 휘저어 놓고 있었어

 

한 바퀴를 다 돌아도 내리라는 사람이 없었다

 

- <시인시대> 2021, 여름

 

 


 

 

김신혜 시인 / 오카리나 사냥법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사냥꾼들

얼음을 깨고 죽은 새를 꺼낸다

새의 몸에 구멍을 낸다

구멍이 많을수록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깨진 얼음 아래 강이 흐른다

얼음 조각과 죽은 새들과 깃털이 물살에 떠밀린다

컨베이어 벨트의 공장처럼

앞서 보았던 장면이 뒤따라 보이고

 

어제 발견됐던 사냥이 다시 발견된다

묻었던 시체를 다시 묻는 것 같다

답을 구하지 못하고

전에도 이 장면에 대해 물었던 것처럼

 

누가 우리의 몸에 구멍을 뚫고

새들이란 질소를 투입하는 거지?

 

사냥꾼들은 새를 움켜쥔다

새의 무게를 기억해낸다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실처럼

얼음 아래 흐르는 강물은 밝다

 

알 수 없는 구멍들을 통과하며

조각난 새들이 만드는 화음

 

침이 고인다

모든 구멍을 다 열고 숨을 불어넣는다

죽은 새는 따듯해지지 않지만

이상할 정도로 매끄러운 소리가 난다

 

-월간《시인동네》2019년1월호

 

 


 

 

김신혜 시인 / 웃음삭제

 

 

선풍기를 들여다보면

이가 시리다

 

날개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식욕이 왕성해

 

회전하는 날개가

나의 미소만을 본떠서 가져간다

 

나는 더 이상 웃지 않고

들판을 달린다

 

입을 벌리고 기계음을 낸다

 

잠자리와 눈이 마주친다

잠자리의 눈은 선풍기 뚜껑 같고

바람이 거세지고

 

회전하는 날개에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머리카락

 

곤충이 먹다 남긴 머리들은

내가 곱씹던 곤충의 맛

 

들판 꼭대기에는 크고 아름다운 풍차가

제각각으로 돈다

 

-『딩아돌하』 2020-여름호

 

 


 

 

김신혜 시인 / 알아채지 못하고

 

 

부드러운 짐승의 털로 붓을 만든다

죽은 짐승을 길들이듯이

털을 쓰다듬어야 윤기가 흐른다

 

붓을 한 방향으로 쓰다듬을 때

털은 소름이 돋는다

짐승들이 핏줄을 세우며 웅크린다

 

흰 종이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붓은 자신이 짐승이었던 때를 모르고

꿈을 꾸며 자신의 몸에 희미하게 퍼지는

짐승의 냄새를 맡는다

 

붓을 대야에 담근다

고기 덩어리 위에 돌멩이를 얹어놓고

핏기를 빼듯이

물이 선홍빛으로 물든다

 

창 너머로 석양이 지고 하늘은

막 수술을 마친 수술대처럼 얼룩져 있다

붓이 마를 때까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잔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다

종이 위에 잘못 그어진 수평선처럼

짐승들이 종이 위를 맴돈다

 

맴돌수록 구정물이 되어가는 발자국과

하늘을 뒤덮은 검은 새들

 

종이가 울지 않기 위해

빈 공간을 칠한다

 

-계간 《문학,선》 2019년 봄호

 

 


 

 

김신혜 시인 / 이탈

 

 

우는 아이를 으스러지도록 안고 있는 여자

여자의 소매를 잡고 딸꾹질하는 아이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처럼

추락해도 바닥에 닿지 않을 것처럼

 

눈 대신 날벌레가 날리고

눈물이 탄환이 되는 세계

 

고양이는 부드러운 착지법을 익히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기로 한다

 

ㅡ『시인시대』 (2019, 가을호)

 

 


 

 

김신혜 시인 / 목장 체험

 

 

 목장은 고요하다 소들은 흑백의 돌처럼 굳어 있다 나는 소젖을 짠다 양손을 번갈아 움직인다 내가 쥐어짠 것들이 양동이를 가득 채운다 하얗고 불투명하고 신선하다

 

 손목을 타고 우유가 흐른다 젖을 다 짜면 소들은 가벼워질까 가벼워진 소를 번쩍 들어서 울타리 너머로 던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 속도를 유지하면서

 

 눈을 깜빡인다 눈을 감으면 육중한 형체가 나를 스치고 눈 뜨면 울타리 너머 팽창하는 소 우유갑을 발로 밟았을 때처럼 한 순간에 바닥으로 퍼지는 얼룩들

 

 얼룩무늬만을 남겨두고 본체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양손이 바쁘고 죽은 소에게서 자꾸만 우유가 나오고

 

 양동이를 들여다본다 하얀 방이 출령인다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완전히 잠에서 깨지도 잠에 들지도 않는다 반쯤 눈을 감은 채 몸을 주무른다

 

 몸에서 가장 연한 부위를 움켜쥐며 갓 태어난 세계로 들어간다

 

-월간 <현대시> 2019년 11월호

 

 


 

김신혜 시인

1991년 서울 출생. 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2018년 《시인동네》 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