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유정 시인 / 무너진 것들 외 10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9. 08:00
이유정 시인 / 무너진 것들

이유정 시인 / 무너진 것들

 

 

텃밭에서 잡초를 뽑았다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 속

거친 뿌리에 기대어

꿈틀거렸을

작고 여린 것들

 

어쩌다

갸냘픈 한세상이

한웅큼 꿀과 함께 뽑혀

흩어져 버린 날

 

사투하던 목숨들이

스멀스멀 내게로 기어들었다

 

 


 

 

이유정 시인 / 경계

ㅡ빛과 어둠 사이

 

 

그것은 가늘고 깨지기 쉬운 선이다

그것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오늘도 나는 그 위를 걷는다

 

나는 매일 코끝 숨에 매달려

무심한 길 위를 한 걸음씩 내디딘다

 

내 손을 잡아 주는 강렬한 유혹

그것은 나를 어둠 속에 가두기도 하지만

공포 밖으로 끌어내기도 한다

 

빛과 어둠 사이

기쁨과 눈물의 선

운명이 그어놓은 선에는

소중한 사람들과 그려낸 흔적이 묻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 여행

종착지를 향해 질주한다

 

그 끝에 다다르면 누군가에게 매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

놓아버려야 하는, 놓을 수밖에 없는, 놓고야 마는

신비의 선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이유정 시인 / 시간의 모서리에서

 

 

잠잠한 여백 속으로 열정이 수그러든다

카푸치노 거품 위에 그려진 문양이

모카 향을 껴안고 울먹인다

 

천년의 여정을 지나왔을까

아니 잠깐의 꿈이었을까

 

손끝에서 미끄러진 미묘한 감정이

시간의 모서리에 부딪혀서 깨어졌다

 

잔 속으로 가라앉던 조각들이 몸을 세운다

공허한 내면에서 피 흘리던 언어가

짙은 침묵 속으로 잠기고 만다

 

해일 같은 두려움이 몰려온다

빛을 잃어버린 말은

싸늘한 세상의 가장자리에 홀로 서 있다

 

미움이 빠져나간 마음은

안개가 흘려놓은 어둠의 진액에 싸여 있고

떨어진 시간이 식은 커피잔 속에서 와글거리고 있다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이유정 시인 / 등뼈를 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둠이 내릴 즈음

무거운 눈꺼풀 아래 산동네는 조용히 숨을 고른다

그곳은 고단한 삶의 은거지

 

노고로 휘어진 창틀은 애처롭게 삐걱대고

가까스로 눈보라를 피한 달빛은 희뿌연 머리채를 풀어 헤치며

헐거운 창가에 끼어 신음한다

 

긴 겨울이 힘겹게 지나가는 길섶에서 뾰족한 아픔이 가시처럼 돋아난다

상처 난 발로 칼날 위를 걷는 듯 시련이 시련을 물고 온다

 

돌보지 않는 무덤처럼 등 구부린 사람들

마음 한쪽이 서서히 무너져 중력이 이끄는 비탈길 아래로 굴러간다

 

심장 한구석에 절망을 가둔 얼어붙은 어둠이

오랜 시간 무뎌진 아픔을 꺼내 놓는다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희망 한 덩이 서서히 몸집을 키웠지만

표정 없는 바닥으로 떨어져, 조각나 버린다

 

-계간 『시와 사람』 2024년 봄호 발표

 

 


 

 

이유정 시인 / 이별

ㅡ기억 속에 머무는 그림자

 

 

이 방, 뿌리 깊은 고통은 껍질에 갇힌 채 숨이 가파르다

 

어둠 속에서 움튼 씨앗이 자라 캄캄한 숲을 이뤘다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시간 속에서

서로의 신경을 거칠게 긁어대고

아픈 뇌수를 쪼아대며 상처를 남겼다

 

때 묻은 생각이 시간을 거슬러 오를 때마다

억지 꽃 피우느라 부르튼 입술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경계를 넘나들며

어긋난 기억을 멋대로 이어 붙였다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목젖에서 돋아나는 비수

점점 뒷걸음치는 한 생은 제 몸을 찔러댔다

 

- 잊히거라, 가거라

이제 삶의 끝을 부여잡고서 바싹 말라가는 몸

애써 외면한 온기는 아직 이 방에 남아 있다

 

지금은 내 손길이 머물지 못하는 곳에 묶인 채

오락가락 깜빡이는 당신

삭풍이 떠난 자리엔 봄도 따라 지는데

가끔 문밖에선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만 앙상하다

 

-계간 『리토피아』 2024년 봄호 발표

 

 


 

 

이유정 시인 / 와락 피어나는 아픔

 

빛나던 꽃게의 발톱이 내 손끝에 닿은 순간

찌릿하게 비치는 눈물 한 방울

와락 피어나는 아픔이 가슴속 바다를 뒤흔든다

 

그물에 걸려 한쪽 집게발을 잃은 분노

짙은 어둠의 무게가 내리꽂히자

천천히 흘러나오는 붉은 선혈

 

놀란 심장이 꽃게의 싸늘한 눈빛에 머물자

동그랗게 눈을 뜬 비명은 소란한 시장 속으로 사라진다

불운한 경험이 머뭇거리며 서 있는 순간

바다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 꽃게의 슬픔이

서서히 나를 휘감는다

 

수족관 유리에 태양의 노래가 흘러내릴 때

산호의 숲에서 잠들어 있던 꽃게의 기억이 깨어난다

어둠 속에서 작은 조개의 숨결을 찾아 포옹하고

조류를 타고 오는 악보에 따라 연주하기도 하며

물의 가락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던…

 

견고한 비밀을 품은 집게발의 서정

잃어버린 발의 통증에서 빚어진 별빛 같은 눈물

그 미묘한 슬픔이 손끝에 스며 시간

의 바다로 침몰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이유정 시인 / 체스판 위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기물 사이에서 언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왕과 폰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운명이 이어놓은 들목에서 망설임은 또 다른 고뇌를 낳는 것인지

 

 두근거리는 심장은 실눈 짓는 살바람을 짐작할 수는 없는지

 지평선 너머 비옥한 땅과 텅 빈 공허 사이에서 무엇에 이끌려 흔들리고 있는지

 모호한 내일의 여정에서 두려움과 기대가 엇갈리는 지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지

 

 마주하는 진실과 허무의 경계에서 수척한 일상은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격려하는 문장으로 남을 수는 없는지

 해가 지는 동안 살아가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간 뒤, 간절한 기도는 어디로 흘러가 버리는지

 혼돈의 물결 속에서 볼멘 눈초리들은 신의 마음을 알아내기는 하는지

마지막에 각자가 선택한 길이 답이 되는지

 

 물음이 물음을 낳고, 꼬리가 꼬리를 물고

 딸랑딸랑

 시간의 종은 울리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이유정 시인 / 치매의 시대

 

 

막막함을 벗어나려는 듯

초겨울 구절초처럼 마구 흔들리는 여자

몸은 시들었지만

기억은 봄꽃으로 피어난다

 

기억과 기억이 충돌할 때마다

남자의 목청이 휘청이는 여자 곁을 맴돈다

 

접혔다 펴지는 그녀의 뒤안길

쑥차 향기에 넣는가 싶더니

빈 수레가 덜컹거리고

뿔 달린 망아지가 뛰어다닌다

 

계절마다 혼미해진 기억을 감추려는 듯

뇌촬영을 온몸으로 저지하던 여자

방사선실로 끌려 들어가며

팥죽을 달라고 소리친다

 

동짓날 붉은색으로

몸속 음귀라도 달래어 보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 속에서 휘청댄다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

 

 


 

 

<동시>

이유정 시인 / 홍시 따기

 

 

아빠와 감을 땁니다

 

장대로 톡 건드리면

망으로 쏙 들어옵니다

 

하나, 둘 올려놓으니

바구니에 그득합니다

 

가지 끝에 달린 감이

속삭입니다

ㅡ난 까치를 기다릴 거야

 

하늘에 걸린 감이

속삭입니다

ㅡ난 흰 눈을 기다릴 거야

 

아빠가 빙그레 웃습니다

ㅡ그만 따자

 

-동시집 《첫눈에 반했어요》

 

 


 

 

<동시>

이유정 시인 / 하얀 꽃길

 

 

환하게 웃으시는

할아버지 사진 앞은

꽃길이에요

 

희준이 할머니도

국화 한 송이

서영이 할아버지도

국화 한 송이

 

이상하지요?

할아버지는

빨간 꽃을 좋아하셨는데 ...

 

할아버지 가시는 길은

하얀 국화만

피어났어요

 

-동시집 《첫눈에 반했어요》에서

 

 


 

 

이유정 시인 / 빈집

 

 

어긋난 사립문으로

바람만 술술

 

찢어진 방문으로

달님만 기웃

 

깨진 장독엔

먼지만 수북

 

마루 밑 검정 고무신

누구를 기다리나

 

 


 

이유정 시인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 예술대학원 석사. 2006년 <아동문학세상> 동시 당선. 2017년 《미네르바》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아라베스크 무늬로 일렁인다』. 동시집 『사라진 물고기』 『첫눈에 반했어요』 등. 제4회 전영택문학상, 제8회 전국계간문예지우수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