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자 시인 / 술래잡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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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자 시인 / 술래잡기
눈일랑 심장일랑 꽃에게 뽑아주고 종이인형처럼 납작해져야겠다 뼈 없고 내장 없으니 질겅질겅 잘 씹히는 여자 봄바람 났다는 소문 듣고 싶다 번지 없는 변두리 어디 숨어들어 새 살림 한번 차려보고 싶다 봄날엔 중심이 없다 목련 지는 꼴 보기 싫어 멀리 돌아갈 때 있고 벚꽃처럼 비명 없이 뛰어내리고 싶을 때 있다 봄에는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아 민들레에게 허리 굽혀 안부를 묻는다 우린 닮은꼴 틈을 노리는 기회주의자 목 길게 빼고 달아날 구멍을 찾는다 우리 서로 모르는 척하고 살자 바람이 꺾이고 그림자 꺾여 돌아가는 골목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고명자 시인 / 다비
큰스님 불 들어가십니다
스님 한 잠 주무신다 소나무 한 채 대나무 한 채 머리카락 한 채 흰 고무신 한 채 사대육신 오장육부 지글지글 태우신다 화엄을 이루신다
쑥쑥 밀어 넣으시게 佛이 잘 타야 하네 와 우노 성불하시는데 니도 함께 다비 시키주까 너매 아베타불 니미 아비타불 개안타, 시원하니 찜질하시는 중이라 치다 볼란께 고프다, 밥 묵고 오자 사리가 많이 나와야 할긴데 펑펑 소리나는 거 봉께 살을 잡숫는갑다 살아 있을 즉에 니도 내한테 잘해라 구름 맹쿠로 노리끼리 올라가는거 저거, 뭔주 아나
큰스님 佛 들어가십니다
바람부처 뜬구름부처 노을부처 있다가 없어지는 부처시라 근심부처 배부른부처 무일푼부처 웃는부처 심술부처 망나니부처 온 힘으로 깨어 있는 부처시라 죽음을 이루는 부처시라
쩌렁쩌렁 운다 생애가 色을 벗는다
고명자 시인 / 너의 숲에 너의 노래가
겨울을 견딘 숲이 넉넉하다 골짜리 나무들 휘파람을 분다 잠결이나 더듬던 젖눈이 배시시 입을 연다 지루한 꿈일수록 깨어나면 맹렬해진다 땅거죽이 물컹거린다 얼어 죽은 새의 발자국이 뽑혀나갔다 햇살의 둘레가 따뜻해지니 불현듯 마을이 떠올랐나보다
늙은 여자의 넋두리 같던 우듬지도 조용하다 가죽만 남은 노파가 그렇게 질긴 목청을 가졌다니 참 모를 일이다 나무는 또 얼마나 커다란 울음보를 지녔길래 겨울이면 深淵을 비우는 걸까 바람이나 탓하면서 울먹여보지만 옹이는 퀭한 내 눈을 바라볼 뿐이다
겨울 내내 내려놓고 간 숨결들의 그늘 발밑에서 풀썩거린다 오늘은 먼 쪽으로 돌아서 가자 아직 밟아 본 적 없는 생애를 밟으러 가자 울음 그친 속 빈 나무들 모가지를 펴서는 햇살에 기대어 서 있다 머지않아 풀리지 않겠느냐고 가지 하나가 수척한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겨울을 견딘 숲의 풍경을 읊고 있다 왜 <너의>라는 이인칭소유격 대명사가 붙었을까?
고명자 시인 / 비명
함께 산 시간에 대한 화풀이 나를 싹싹 핥아먹은 너를 박살낸 후련함 삼십 년 한자리만 뱅뱅 돌아 어지러운 외마디 결혼할 때 산 접시 마지막으로 날려버렸다 골백번 더 뛰어내리고 싶었으나 손가락으로만 질러대던 쨍그랑 밤 깊어 서쪽하늘 노란 접시 떴다
고명자 시인 / 자두
꽃핀다, 가렵다 내가 풋것이었을 때 죽을힘으로 도망쳤지만
철딱서니 없는 몸 붉은 반점 핀다
세상에서 제일 큰 자두나무 세상에서 제일 큰 자두 접시 나를 먹여 키웠어
몰래 따먹었다고 자두씨, 지금도 돌팔매질 하나봐 시장 문턱에서 딱 마주 친 내 안의 그늘 빚 갚으라고 따라다니는 자 두
꽃 따먹던 계집애 뒤란, 혼자 앓던 배앓이
내 몸을 관통했던 풋자두 나를 거부한다
고명자 시인 / 파꽃
누가 또 발목을 접고 앉아 넋두리를 풀고 갔나 제 속 다 비우고 떠났나
꽃도 아닌 것이 꽃같이 피어서는
어디서부터 생각을 놓쳤나 골똘히 늙어간다
너의 낯빛 너무 매워서 엎질러진 맹물처럼 나는 운다
슬픔 없는 내 노래를 바칠게 그만, 잊어라
구름 비켜난 폐허에 처박힌 꽃모가지 허리를 펴려고 눈 부릅떴다
닫힌 말문의 안쪽 아직 뜨겁다
고명자 시인 / 로터리는 양파처럼
비둘기는 걸레뭉치 세상 끝까지 닦아보겠다는 눈부신 의지다 누더기 평화, 쫓아버려도 온다
오래 참았던 소리가 쏟아져 내린다 양말 장수가 어제의 길목을 지켰고 오늘은 일 톤 바다 냄새다 로터리는 하루 25시를 지향한다
상추잎만한 할머니가 텃밭 한 광주리 다듬는다 묶는다 기다림은 각자 같은 질량의 지루함이기에 판다, 바람 빠진 바퀴처럼 앉아 신호가 깜박인다 내 눈꺼풀이 뛴다
로터리는 해지는 쪽으로 돌아앉았다 폐가 마루에 앉아 듣던 빗소리 사막뿐인 사막의 펑펑 우는 여자
아무도 원치 않는 전쟁과 살결 검은 고아들 우리가 모르는 바람결에 몇 번 겹쳐진 눈동자다 지구를 비롯한 둥근 것들의 병든 속꺼풀이다 양파를 까는데 눈물이 난다 구름 높이로 전세든지 한 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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