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순아 시인 / 배운 사람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9. 08:00
김순아 시인 / 배운 사람

김순아 시인 / 배운 사람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올곧게, 라는 뜻은

알지 못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는 말부터 배웠다

배워서

배운 대로 살았다

삐딱해 보이지 않게

기우뚱 기울지 않게

왼발이 오른발을 모르듯

오른발이 왼발을 모르듯

옆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김순아 시인 / 간다

 

 

 간다 한 여자목련꽃 꽃 터지는 거리를 지나 아까시 희디흰 꽃냄새 물큰 흐르는 언덕을 넘어 은행나무 노란 열매와 플라타너스 널따란 잎그늘을 가르며 간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자신도 알 수 없다 생은 언제나 오늘에서 내일로, 낯익은 곳에서 낯선 곳으로 길 떠나는 것, 한 여자 되돌아보는 일 없이 간다 가다가 꽃만나면 꽃이 되고 들풀 만나면 들풀이 되고 안개비 만나면 안개가 되어서, 그 만남에 잠시 젖어 따스해하면서, 이내 다시 길 떠난다 꽃 떠나며 꽃을 잊고 풀 떠나며 풀을 잊고 비 떠나며 비를 잊고 그 이름도 의미도 모두 잊고 불러도 답하지 않고 간다 푸른등 반짝이는 너도밤나무 뒤 찬바람 걸어간 산벚나무 위 공空공空공空으로 가는 달처럼 한 여자 끝없이 가고 간다

 

-시집 《슬픈 늑대》 중에서

 

 


 

 

김순아 시인 / 관대한 신神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편의점, 거기서 내가 만났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 중에는 자식을 죽여 방안에 몇 년째 방치해 놓고 방향제를 사러 나온 아버지도 있을테고, 부모 유산을 탐하여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근처 법무사사무소에 가 유언공증을 받고 나온 큰아들도 있을 테고, 혼자 아이를 낳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목이 말라 우유를 사러 온 여학생, 게임기자판을 두들기다 심심하여 지나가는 또래 아이에게 삥을 뜯고 그 돈으로 컵라면을 사러 온 남학생, 바람난 아내를 뒷조사하다 속이 아파 소화제를 사러 온 남편, 몇 년째 취업에 실패하여 부모 눈치 살피다 담배를 사러온 총각, 강제로 명퇴당한 실직자, 무명시인, 심지어 맞은편 절에서 사람으로 위장하고 소주를 사러 온 부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24시간 열린 편의점은 그 모든 존재를 다 받아준다.참으로 관대한 신神이다.

 

-시집, <슬픈 늑대>에서

 

 


 

 

김순아 시인 / 본색

 

 

 가 닿는 것

 어디엔가 닿기 위해 자신을 흐리는 것

 

 해가 저물면 빨강도 제 색을 허문다. 그 어깨에 검정이 굴러와 포개지고, 파랑이 굴러와 겹쳐진다. 그 사이로 노랑이 스며들어 초록에게 굴러가면, 초록은 파랑의 등허리로 미끄러지고, 파랑은 제 허리를 기울여 보라가 된다. 스며들지 않는다. 보라는 그저 제 색을 흘리며 분홍 옆에 가 선다. 색은 그런 것, 제가끔 뜻대로 자신을 흐리면서 가 닿는 것이다. 적어도 둘은,

 

 그렇게 닿아서

 겹쳐지면서

 다름을 다름으로 꽉 잡는 것

 

 


 

 

김순아 시인 / 그들의 사랑

 

 

외로운 꽃이 가지를 떠나 작은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달도 별도 새도 산도 깊이 잠든 어느 밤이었다

떨어진 꽃이 연못의 깊은 질 속으로

제 몸을  더 깊이 찔러 넣는지 거웃 같은 물풀들

흐흑흐흑 우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밤내  저들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수면에

저토록 선명한 선혈의 흔적 남아 있을 리 없다

수련이 그냥 피어났을 리 없다

 

 


 

 

김순아 시인 / 파도

 

 

가야 한다

멍든 이 몸

바람 되밀더라도

가야만 한다

천만 리 바닷길

내 아직

살아있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꼭 한번은

그 섬에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피맺힌 산호 나를 흔들고

바다 위 나는 물새

돌아서라 그만 돌아서라

나래 치더라도

눈 먼 듯

귀 먹은 듯

거기 그 꿈꾸는 섬으로

나는 살아서 가야만 한다

 

-시집 『푸른 파도에게』에서

 

 


 

 

김순아 시인 / 클레멘타인

 

 

안개 같은 너를 잊고 살았다

눈물 같은 너를 잊고 살았다

세월에 밀려가는 물살에

속절없이 떠가는 조각배 되어

너를 참 오래 잊고 살았다

아침마다

지나는 바람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하이얗게 떨어져 내린 눈꽃처럼 내

자욱하게 가슴 시린 슬픔이던 너를

잊고 살고 있었다 아득히

아득히 너를 잊고 살고 있었다

 

 


 

 

김순아 시인 / 그들의 사랑

 

 

외로운 꽃이 가지를 떠나 작은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달도 별도 새도 산도 깊이 잠든 어느 밤이었다

떨어진 꽃이 연못의 깊은 질 속으로

제 몸을  더 깊이 찔러 넣는지 거웃 같은 물풀들

흐흑흐흑 우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밤내 저들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수면에

저토록 선명한 선혈의 흔적 남아 있을 리 없다

수련이 그냥 피어났을 리 없다

 

 


 

김순아 시인

경남 양산 출생. 부경대 대학원 문학박사. 2001년《한국문인》을 통해 시 작품활동 시작, 2017년 《시와사상》을 통해 평론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파도에게』 『슬픈 늑대』 외 , 에세이집 『우리 유쾌한 호통(好通)의 방식들』 2권과 시론집 『현대 여성주의 시로 본 '몸'의 미학』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