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류빈 시인 / 여수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9. 08:00
최류빈 시인 / 여수

최류빈 시인 / 여수

 

 

비가 오고 나 여수에 있다

너와 겸상하던 처마 밑에서 홀로 비의 개수를 세어보고 있다

다섯 갈래로 적하하는 물의 손가락

손 뻗자 천 갈래로 부서지는

허공의 물장난을 목도하고 있다

바다가 눈에 번지고 두 눈은 군도

좌도와 우도 언저리에 네가 있다

나는 구름을 닮은 지도 넓게 펴고서는 당신

위치한 곳을 한 점으로 짚어보려 한다

유리알로 깨져버린 물방울보다는 더 큰 영토

다 젖은 여수, 잉크 자국이 배를 타 겹을 만든다

물에 떠 옮겨온 여수 세염 없이 노 저어도

비는 하릴없이 오고 너는 먼 땅에 녹아버려서

여수에 올 수 없다 온몸을 천공하듯 조롱하는 저 비

그러모아 물의 전언을 보내려고 한다

없는 고향툇마루까지 다 여기 당겨와서는

궁둥이를 붙이고 양말이 젖는 걸 바라보자 말한다

네가 물처럼 투명해지고 손은 흘러내리려 할 때

동백잎 붉은 손톱처럼 나앉아 너는 빙점 아래

희붉은 네가 굳어 빙산으로 떠가는 걸 보며

저 섬의 가랑이를 붙잡고 온난한 곳까지 떠가고 싶다

비는 오고 나, 여수(旅愁)에 있다

먼 곳인가

 

 


 

 

최류빈 시인 / 물의 두 점

 

 

파랗게 찬란한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버릇처럼 눈에 걸리는 빛의 칸타타

바다는 누군가를 추억하기에 좋은 장소다

조류가 구두 뒷굽을 접고 아스러지는 순간이야말로

누구도 묘사할 수 없는 장관이다

이 광경이, 윤슬 빛나는 저 피복들과

그 속에 웅숭거리는 모든 것들이 너란 역사(歷史)의 후문이라는 게

전설처럼 푸른 지느러미를 달고 다시 아이처럼 안겨볼까

기억 속에서 긴긴- 레퀴엠을 찢어버리고 싶다

수중에선 무엇도 잡을 수 없는 다섯 갈래 손마디

물갈퀴가 퇴화한 합곡혈이 빵처럼 부풀어 온다

심장을 적시면서도 전부를 쓸어가는 피에타

모든 것을 주면서도 모든 것을 차지하려 하는

불의 활자처럼

파란 벌판은 이글거린다 가장 뜨거운 불꽃의 색감

일렁이는 바다를 들불이라 불러도 절대 직립하지 않는

숭고한 신념, 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 타버려 가장 먼저 부표로 떠오르는 이름이다

불꽃의 밑바닥은 퍼렇게도 안녕하시냐 묻고 싶었지

불티 튀튀거리는 기억들은 물속에도 적(籍)을 둔다

이곳이야말로 천길 크레바스

문득 꺼졌던 기억들이 파도에 섞여 모스 부호로 깜빡, 온다

그건 묘사되는 졸음

다시 파도에 두 눈이 걸린다 마구잡이의 난반사

바라보는 족족 잉걸불도 없이 놈은 뜨거워지는 놈

희나리를 온몸에 품고서 바다로 투신한 채로

갈지자로 흔들려야만 발화하는 해무의 시간이다

계곡과 대양의 차이 혹은 갈매기와 물고기의 고저(高低)를 생각하다가

너를 본다 한철 피서지나 바닷가라는 말은 너무 가벼워

분신하다 결국 부서질 것만 같고

아,

더듬거리는 손으로 너 찾는 지독한 습성

사장에 글씨를 쓰면 바다가 아귀를 벌린다

당신은 숨죽이고 있다

혹은, 네가 살아 돌아와 해안선처럼 춤추다

입간판 네온사인 하나 없이 펼치는 댄싱 카니발

예령 없이 찾아오는 파도 소리에 다시 소금인형으로 굳는다

바다 생물들이 파놓은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발목을 쓸어주는 기념비적인 순간들 양말까지 젖어도 나 그대로 서서

신발 속으로 차오르는 기도들을 그대로 느낀다

너는 넘실대는 파마머리를 한 것만 같아 직모였던 사람과는 이질적인 해안선

머리칼을 잡아당겨보려다 무릎부터 쓰러져

젖은 모래에 두 점을 찍는다

두 점에서 번지는 눈두덩이가 젖은 눈망울로

무릎과 무릎 언저리의 것들을 어른다 그렇게 오감에 관하여 말하려다가

당신이 보던 바다의 빛깔이나 밤마다 괴로워하던 잠의 색채를 난

도무지 알 수 없지 음성조차 거품처럼 풀어지는데

두 손에 물을 그러모아 올려봐도 어디서 찾아낸 빈틈인지

물은 손 아래로 종유석을 뻗더라

그 어떤 폭설 바다에 스며도 너의 표정은 절대 굳지 않지

눈 쌓이지 않는 바다는 연습된 무욕(無慾)일까

시각이나 기억, 청각이나 촉각 그 모든 것으로

바다를 기억할 수 없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바다 냄새

부드럽게 머릿결 풀어지며 퍼지는 샴푸 향기 같은 것만큼

우리를 다정하게 추억하는 방식은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순간을 사는 다시는 되풀이 될 일 없는

수군거리는 물결은 한철 바다의 지문인가, 파도의 편력(遍歷)인가

슬퍼해야 할 일일까? 짠물 넘치는 세상의 끝을 등지고

가루로 환신(換身)한 우두커니 氏가 꼭 천식을 일으킬 것만 같은 이곳

길게 헤엄쳐가는 염장, 천길 물의 나라에 영겁을 살 테지

매정히도 살을 떼어가는 칼바람 물고기 밥, 어디 이름 모를 대륙의 끝,

꽃처럼 탄신한 바다포말로 걸려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거겠지

너를 따라 복판에 작은 나룻배를 띄울 때마다

차라리 뒤집혀 삼켜지는 꿈을 꾸곤 했었다

꼬르륵 침잠하면서 잠함병 같은 저 너머의 것들 생각도 않고

바다의 바닥론에 닿고 싶기도 했다, 그만 너를 하얗게 안아주는 연습을 해볼까

파도는 부서지면서 재가 되는 단련 하고 있으니

무심코 가라앉던 포즈에 각도가 없다

물속 세계가 대류하면서 나의 등허리를…… 회오리로 밀어주고 있다

날카로운 무엇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자꾸만 사장 위로 밀어내려 한다

야박한 생이 회심의 정권을 지르는 것처럼

자궁에서 허공으로 허공에서 자궁으로 회귀하는 진리

주먹을 펴자 갈라진 빗금 사이로 물줄기 가득 올라

혼미하다 우리가 만난 적 있었던가?

이쪽부터 저쪽까지 왕래한 두 점을 보다가

단지 음각으로 적힌 모래 한 줄 이름일 뿐인데

가끔 짐승처럼 목놓아 울고 아가미 꼬르륵거린다

시시프스의 형벌처럼 파도는 철없는 테트라포드 온몸으로 들이받아

단지 이름일 뿐인데 딱 한 아름 유리처럼 부서진다

한동안 바다에 빠져 있던 나의 두 눈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3월호

 

 


 

 

최류빈 시인 / 백 사도에서 끓는

 

 

내가 알고 있던 정의에서 끓는 완벽한 물이 없다

저 순수물질은 온 몸을 덥히려고 서로 공진하는데

먼 곳에서 기어오는 것들

아니 내 안에 똬리를 틀고 팔짱낀 놈들이

백사처럼 스멀스멀 기어간다

층층이 쌓인 비늘과 비늘의 집

혼합물의 끓는점은 백도씨보다 높아

구부러진 황색 독사의 무리

물에 투하하다가 참, 맛있는 라면은 스프부터

돌돌 말릴 기장조차 안 되는 놈이

스프 따위는 천성에 안 맞아 꺼리는 물질이 순수를 주장하다가

결백하게 백사도 어렴풋이 바라보다

온도계 수은, 터진다 길게

허여멀건 파충류, 기어온다 기어코

 

-시집 『장미 씨, 정오에 피어줄 수 있나요』에서

 

 


 

 

최류빈 시인 / 복어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의 일이야 머리 위 애드벌룬처럼 부푼 복어를 보면 어찌나 무섭던지…… 부피를 늘리는 습성이든 독이든 복어는 최후의 한 방이 있다니까!

 

 하고 복어지리탕 한 국자 뜨며 얼큰한 크- 소리 늘어놓는 사람들, 어쨌거나 밟아버린 건 유령들의 소란. 마블링 핀 복어 건더기 무용담으로 떠오른다

 

 


 

 

최류빈 시인 / 반입 금지품들의 목록

 

 

엄포를 놓자, 다음 번 볼 때는 다른 건 다 두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들만 가져오라고

 

기쁨이란 참 초라한 것이어서 반짝하는 이야기들은 한철, 오감의 자위밖에 안된다고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웃게 될지 기록할 펜과 수첩

 

약소국가가 되어보자 다정한 것에 경보를 울리자 한 두릅으로 우리의 표정을 걸어놓자

 

나의 등에 아무렇게나 휘갈겨도 좋으니 세상 이야기는 검열하고, 긴 그림자로 평상에 누워 우리 달큼하게 지루하자

 

 


 

 

<동시>

최류빈 시인 / 새놀이

 

 

겨드랑이를 벌리면 새가 돼요

새가 될 때면 쿵쿵 점프해도 괜찮아요

점프를 해도 그저 날아가는 동안이니까

 

새 놀이를 하면 날갯죽지가 아파와요

저 멀리 프랑스 파리 조그맣게 보이는데

기웃기웃 창문 밖

빨강, 파랑, 하얀 빛 프랑스 만국기처럼 들어와요

 

짹짹거리는 울음소리를 내 주어야 해요

그래야 꼭 날고 있는 기분이니까요

 

너무 멀리 떠나와 둥지를 잊었어요

여섯시 반이면 애벌레 찌개 코끝을 찔러요

찌르르르 하며 몸을 감싸는

달콤한 냄새, 흔적을 찾아가야 해요

 

한 점씩 떨어뜨려 놓은 새의 깃털. 그담엔 저 바람을 느끼는 거예요

 

가득한 냄새들 깃털 속에 품고 돌아와서는

주머니를 홀랑 비우고 세모 부리 뻐끔이는 거예요

그곳이야말로 포근한 둥지예요

 

-경상일보닷컴 - 2019 신춘문예 당선작

 

 


 

 

최류빈 시인 / 하데스

 

 

 왜 울음들이 모이는 곳에는 검은 옷을 입어야 합니까? 우리 새하얀 옷을 입기로 해요. 저 먼 곳에서 한 점일 우리를 볼 때 잘 보이는 편이 더 좋으니, 천사들의 제국을 짧게 배웅하는 배경으로 순백의 고원이 나을 테니까. 묵묵한 슬픔 들은 척추를 타고 올라 정수리로 모여든다지요, 그런 까닭에 우리 머리털은 검은 거래요. 초연한 슬픔들이 다 새버리면 그때야 백발성성하게 오르는 겁니다.

 

 구름 위로 연착된 생에 만큼 이른 도착도 온다지요. 늦어 진출발들은 신호탄을 피워 울긋 불긋 물드는 허공을 맴돌며 구름에 녹아갑니다.

 산성비를 좋아합니다. 당신이 녹아내린다고 믿으면 꼭 그런 것만 같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넥타이만은 꼭 착용하기로, 커져버린 울음들을 잠글 때 꼭 필요할 테니까요. 여기 곡성哭聲하나 없는 곳, 이 세계에 호상이란 있는지요? 상에 오르는 편육이 꿈틀댑니다. 모든 울음들은 잉태되는 순간에 가장 몸집이 작습니다. 그 다음은 곡면을 타고 흐르는, 단지 질주하는 설움입니다. 넥타이를 잘 조였습니까? 옷깃은, 옷깃은 잘 여몄습니까? 저 일어납니다. 거기 꿈틀대는 편육 한점 질겅 씹고 채색된 옷을 빼며 용케 웃을 겁니다.

 

-시집 <오렌지 신전>에서

 

 


 

최류빈(崔柳頻) 시인

1993년 전북 익산 출생. 필명: 최지안. 전남대학교 생물공학, 시설경영학 전공. 2017년《포엠포엠》에 <간빙기 밥통> 등 3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오렌지 신전』 『장미氏, 정오에 피어줄 수 있나요』 『몇 시간씩 생각하곤 해』. 2018년 광주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천강문학상〉 · 〈최충문학상〉 우수상, 〈동교인재상〉 대상(문학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