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대 시인 / 탈 것 외 6편
|
김성대 시인 / 탈 것 아무도 보이지 않아 이제 곧 그곳인데 이제 곧 그 시간이야 이 장면은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다 그것은 그래 누가 타도 넘어지게 되어 있지 누가 타도 사고가 나게 되어 있지 실험은 이미 끝났고 결론은 내려졌어 실험이 끝나기까지 아름다운 아이들이 병신이 되었지 아름다운 아이들이 늙어 갔지 위험을 알게 되는 건 늙는 일이야 하나도 늙지 않은 그것은 늘 다시 돌아와 있지 그 곳에 그 시간에 그것의 한국 나이를 알 수 없어 그것은 피할 수 없어 오늘은 또 누가 그걸 탈까 아는 사람이지 그것도 알고 우리도 알지만 자신은 알 수 없는 우리가 우리를 기다리는 방식 우리가 하나 더 는다는 것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아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거 같다 이제 곧 그 곳이데 이제 곧 그 시간이야 오늘은 나야? 지금 나 그것을 타고 있는 거야? 계속 이 물음 속에 정지해 있어야 한다는 것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김성대 시인 / 납굴증
밤의 소리들이 만질 수 없는 귀를 음각한다 귀 가득 무엇이 이리 무거울까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귀는 말라 가고 우는토끼, 몸 안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몸을 얻고 나서 몸 밖으로 나오기가 어려워진 이 밤은 누군가의 눈 속 같군 눈알이 염주가 될 때까지 이 밤을 모으고 있는 눈은 누구의 것인지 우는 토끼 속의 우는 토끼 돌아보는 눈까지 멈추고 한 벌 귀로 남은 밤 미결 이것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긴 귀, 피가 미치지 않을 만큼 긴 귀가 결론을 뒤집지는 못했다 눈알을 반시계 방향으로 굴리며 관점을 덜어 내고 있는 그들의 정신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없는 귀 가득 명료한 결론들 정신은 없는 귀에 순응하는 것이다 귀가 좁아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자신을 듣는 귀 안쪽이 비리다 이름이 너무 길거나 붙일 수 없거나 귀의 기억만으로 그들은 자신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귀가 없다면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눈이 없다면 계속 귀 기울여야겠지만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에서
김성대 시인 / 두 번째 밤이면 동물들은
두 번째 밤이면 동물들은 가죽을 벗고 만난다 습성을 벗고 먹이 사슬을 벗어나 맨몸으로 만난다 무늬를 타고 천천히 멈추는 동물들 두 번째 밤이면 가죽을 씻고 허물을 갠다 뒤돌아보는 몸이 투명해질 때까지 얼굴을 잊은 듯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두번째 밤이 지나면 동물들은 다시 가죽을 입는다 두 번째 밤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헐렁해지는 가죽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바뀌기도 한다 누구의 것이지 모르고 흉터가 깊어지기도 한다 들숨 안에서 차가워지는 날숨 날숨 안에서 차가워지는 들숨 가죽의 습성을 충실히 할 시간이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먹이가 된 자신과 마주칠지도 모르고 동물들은 귀를 세운다 다시 두 번째 밤이 올 때까지 동물들은 자신을 쫓으면서 사는 것이다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에서
김성대 시인 / 이안류
독일의 바람이 침대맡에 닿았다 가방을 풀자 고인 물 같은 바람이 쓴 입술에
평화로운 곳이었나 독일은 약간의 결벽이 맥주 맛을 좋게 한다는 걸 꼭 확인했어야 했나 차가운 비 검은 호수에서
우리를 비스듬히 비껴가는 추분 무렵 인간이 없는 세상을 꿈꿔본 적 없는 벤야민들은 밤이 더 길었다
결벽은 너를 너이게만 해.
그래서 너를 너이게 하지 않지.
다 쓴 수첩은 산문을 연습하고 금요일에는 자명한 문장을 썼다 말이 되돌아올 때 감기는 침묵과 침묵이 닿지 않을 때 갖게 되는 입술을
당신은 며칠입니까? ......열아흐렙니다.
흐릿한 사진처럼 우리는 흐릿해졌다 세계의 날씨에 우리의 날씨는 속하지 않았고 어느 곳에서나 여행의 불가능함을 소급해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감정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시간에도 감겨 있지 않아 이곳까지 흘러온 오늘, 전 세계에 비 내린다
우리는 그때 같이 없었다
years later years later
김성대 시인 / 아랍인 투수 느씸
느씸은 공을 쥐지 않고 던진다 긴 손금으로 공에 대해 기도하고 시간 속에 공을 놓는다 공은 한없이 느리지만 시간의 결을 타고 반시계 방향으로 공회전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확한 타자라도 맞출 수 없다 공에 대한 기도가 시간을 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받을 사람은 없고 느씸은 자신이 던진 공을 노려보느라 눈이 충혈된다 공은 젖어 가고 느씸의 눈은 폭발하고 빨간 눈이 흩어지고 흩어진 눈들이 느씸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던진 공은 눈먼 그만이 받을 수 있다
김성대 시인 / 함구
함구는 조금씩 우리를 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함구는 조금씩 바깥에서 깊어진다 여기는 속 없는 굴속 같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깥을 모으는 굴은 지상으로 입을 벌리고 토끼는 반시계 방향으로 굴을 오른다 빨간 눈은 데굴데굴, 먼저 굴러가 있다 있는 힘껏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뛰기 토끼는 자신의 눈을 보면서 달리는 것이다 자신을 함구하는 빨간 눈이 토끼의 공률이다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에서
김성대 시인 /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날마다 나비의 무늬를 읽으면서 서부음악을 듣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채식을 주로 하는 편이지요 우연히 상추에 붙은 나비 알을 먹고 나선 나도 모르게 뒤꿈치가 들려요 그럴 땐 빠리나 서귀포가 생각납니다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어떤 날은 터널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요 터널 저쪽엔 비가 오기를 바라지만 터널 그리고 터널, 뿐이지요 물잠자리의 날개와 독버섯의 얼룩이 눈앞에서 맴돌아요 그럴 땐 아주 먼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집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책방에 갑니다 거기서 사랑의 묘약을 찾은 적이 있어요 부끄럽게도 마음이 설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걸 믿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박쥐들과 부릅뜬 부엉이들이 나의 행운을 뜯어먹으러 달려들 거예요
가끔 꿈속에서 운 날 아침은 눈이 맑습니다 그럴 땐 눈 위에다 예쁜 나비를 새기고 싶어요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날개가 접혔다 펼쳐지겠지요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언제 한번 놀러 안 오시겠어요?
*고야의 판화
-시집 《사막 식당》 창비.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