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명 시인 / 비 오는 소리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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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명 시인 / 비 오는 소리
천변의 풀숲에 촉촉촉 빗방울 꽂히는 소리
풀잎마다 빗방울 되받아치는 소리
풀잎들이 손을 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먹은 빗물을 다시 아래로 푸르르륵 흘려보내는 소리
우산을 쓰고 천변을 걷고 있는 내 귀에 들리는 소리
누군가 내 속에서 울고 있는 소리
나는 울고 있지 않은데 누군가 내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소리
<우는 건 우리 영혼이 샤워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듣고 있는 내 속 울음소리 비 오는 소리
*영화 젤리 중에서
―《시와소금》, 2019년 여름호
이나명 시인 / 구름신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만나러 오기도 하나요 한 생에 흘린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놓인 징검다리가 되나요 그렇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러 가기도 하나요 바알갛게 피가 도는 구름신발을 신고 겅중겅중 서쪽 하늘길을 건너서 만나고 또 헤어지나요 가슴에 고인 눈물은 하늘길에 올라 뭉게뭉게 구름이 되고 다시 유리창을 통과해 집에 돌아오나요 돌아와 잠이 들면 모두 꿈이 되나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만나는 꿈길이 되나요 잠귀에 들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는 바알갛게 피가 돌고 죽어서도 살아 있나요 우리 함께 살아 있나요
―《시와소금》, 2023년 봄호
이나명 시인 / 신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
벌 나비가 오지 않는 고층 베란다 제라니움이 활짝 꽃잎을 피웠다 꽃 판 한 가운데 노란 꽃술을 한껏 들어 올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린다 이 간절한 기다림의 시간
가만가만 꽃에게 다가가는 내 검지 손가락이 끝이 꿀벌의 날개처럼 떨린다 파르르르르 내 손 끝에 노란 꽃가루들이 다투어 달라 붙는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며칠 후 꽃대들이 잘 여문 씨 주머니들을 장총처럼 세워 들었다 팡 팡 꼬리 끝에 흰 날개를 단 씨앗들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나명 시인 / 늙은 매미
양 날개는 양 옆구리에 엉성히 붙이고 앞의 네 발은 허공에 띄운 채 두 뒷발로만 겨우 문턱을 붙잡고 있는 세상에서 떨어져 내리기 직전의 너를 본다
우매한 내가 어찌해 보고자 유리창을 탕탕 두드리며 너를 깨우려 한다
네 앞발들이 조금 움직여 허공을 잠시 바득바득 긁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허공은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유리창 밖의 세계와 유리창 안의 세계가 눈이 딱 맞아 떨어진 이 시간에 죽음은 아주 가까이서 잠깐 숨을 죽이고 나를 들여다보고는 휙 사라졌다
아무 자취도 없는 내 안의 허공 중에서 누군가의 발가락질이 가물가물 느껴진다
이나명 시인 / 나무들이 길을 지운다
땀을 닦으며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산 벼랑 밑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슬한 벼랑 밑으로 새끼줄 같은 오솔길들이 여럿 갈라져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때 내가 갔던 오솔길은 어디쯤인지 나무들은 두 손 높이 들어 무어라 무어라 소리치고 발 빠른 계절은 발소리도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 힘에 부친 내가 큰 곰바위에 등 기대고 쉬는 사이 속이 타는지 산은 마른기침 컹컹대고 나무들은 이미 등짐을 풀어놓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수북수북 내 발등을 덮고 사방 길들이 메워지고 있었다 오솔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여기저기 지워진 길들이 내 발목을 휘청거리게 했다 나는 그곳에 오르기 위하여 나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무들이 애써 지워놓은 길을, 내가 다시
-시집 『그 나무는 새들을 품고 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나명 시인 / 응답
하느님 하느님하고 간절히 불렀다지요 하느님 하느님 대답 좀 해 주세요 몇 날 몇 밤 간절히 간절히 두 손 모으고 두 귀를 모으니 마침내 어떤 소리가 들렸다지요
"네 안에 나 있다"
하느님 하느님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안 보이잖아요 거기 계시지만 말고 나와 보세요 간절히 간절히 두 손 모으고 두 귀를 모으니 다시 대답하셨다지요
"나는 너다"
뭐라구요 당신이 나라구요 아이구 하느님 말도 마세요 당신이 나라니요
「그래 네가 나다 그러니 나를 보려면 너 자신을 잘 들여다보아라」
"거기 사랑이 있느냐"
이나명 시인 / 작은 잎사귀들이 세상을 펼치고 있다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돋아있는 민들레 잎사귀들이 작은 실톱 같다
이제 막 시멘트 블록을 힘들게 톱질하고 나온 듯하다
무엇이 저렇듯 비좁은 공간을 굳이 떠밀고 나오게 했을까
저 여리고 푸른 톱날들을 하나도 부러뜨리지 않고 시멘트 블록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다
이제 꽃대를 올리면 금빛 꿈의 꽃망울이 허공에 반짝 피어나겠지
시멘트 불록과 불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작은 민들레 한 포기 푸르게 펼쳐놓은 세상을 본다
저 푸른 세상 속 그 무엇이 이렇듯 나를 잡아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짐짓 끌려가 또 한 세상 깜빡 빠져드는 것일까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 가느다란 틈 사이
실톱 같은 작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세상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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