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환 시인 / 낡음에 대하여 외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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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환 시인 / 낡음에 대하여
낡음 때문이다. 눈 내리는 겨울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다시 겨울이 오고, 눈은 아직 내리는 것,
낡음 때문이다. 살갗의 무늬를 밀며 바람이 지나가는 것, 온 몸으로 바람의 무늬가 밀리는 것, 서로 닳아지며 살 비비는 것,
낡음 때문이다. 자주 목쉬는 것, 더 자주 날 저무는 것, 또 물 위에 눕는 것,
낡음 때문이다. 늘 붉고 이마 붉는 것, 못 박는 소리 들리는 것, 사람이 박히는지 걱정하는 것,
낡음 때문이다. 구부리고 이름 부르는 것, 땅바닥에 얼굴 부딪치는 것,
낡음 때문이다. 돌아오는 사람이 야위는 것, 느린 그림자를 끌며 늦게 돌아오는 것,
낡음 때문이다. 추운 날은 반드시 등이 어는 것,
살 벗고 웅크리고 잠에 드는 것, 자면서 뼈가 비는 것, 빈 눈확에 어둠이 고이는 것, 낡음 때문이다.
위선환 시인 / 구멍
저기서도 구멍은 컴컴하고 검게 털이 자라는지
가맣게, 하늘 아래쪽이 뚫려 있다
그 여자네 집 뒤란에 선 살구나무가 확, 살구꽃 꽃송이들을 터뜨린 날 간 겨우내 메말랐던, 종잇장 같은 그네 몸에도 우련하게 꽃그늘이 비쳤던 게다 몸 안에 몸 숨기고 몸 밖을 내다보는 일이라 날숨 삼켜가며 창구멍 뚫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질렀겠지만 그만, 제 몸에다 동그랗게 구멍을 내고 말았다
발끝 세우고 서서 처음 넘겨다보는 참 맑게 갠 하루다
위선환 시인 / 가슴을 때리다
바위에 이마 대고 오래 울다 간 사람이 있다. 바위가 젖어 있다. 바람에 등 대고 서서 등 뒤가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다. 등판에는 바람 무늬가, 등덜미에는 바람의 잇자국이 찍힌 사람이 있다. 무릎걸음으로 걸어서 닿은 사람 있다. 물 바닥에 무릎 꿇은 사람 있다. 두 손바닥 포개 짚고 엎드려서 이마를 댔던 자국이 물에, 우묵하다. 바짝 마주 대고 마구 누구를 때렸던가. 움켜쥔 주먹이 멍들었다.
위선환 시인 / 모퉁이
모퉁이는 쓸쓸하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이 쓸쓸하고, 모퉁이를 돌아 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쓸쓸하고, 어느 날은 모퉁이를 돌아가는 내가 쓸쓸하다. 아침부터 걸었고, 날 저물었고, 깜깜해졌고, 진종일 모퉁이에 부딪친 나의 모퉁이 쪽은 모퉁이가 드나들게 파였는데, 나의 모퉁이 쪽은 갈수록 파이고, 나는 아직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나의 모퉁이 쪽은 갈수록 파이고, 나는 자꾸 모퉁이 쪽으로 꺾이고, 어디쯤인지, 언제 쯤일지, 모퉁이는 끝 간 데 없고...
위선환 시인 / 얼음꽃
죽음이 지루했으므로 그는 뒤채며 몸에 감긴 수의를 벗었는데 살 까풀에 내비치는 속살이 흰 것 하며, 옆구리와 오금에 드리운 살 그늘이 연한 것 하며, 사타구니와 손등에서 터럭 자라는 것 하며, 손톱 발톱의 각질이 투명한 것 하며 눈 감은 지 몇 해째인데 아직 다 죽지 못한 안타까움까지, 그렇게 간절한 것 말고도 몸이 휘도록 사무쳤던 것은 처음으로 그가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숙이고, 허리 꺾어서 바짝 귀 대고... 그러나 들리는 것은 이빨 자라는 소리, 뿐이었다 차고 단단하고 잇몸이 얼어붙는 이빨 끝이 시린, 이 고요
위선환 시인 / 새의 길
새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어떻게 눈 덮인 들녘을 건너가는지 놀빛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지 짐작했겠지만
공중에서 거침이 없는 새는 오직 날 뿐 따로 길을 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 손가락을 세워서
저만치 빈 공중의 너머에 걸려 있는 날갯깃도 몇 개 떨어져 있는 새의 길을
가리켜 보이지만
위선환 시인 / 돌에 이마를 대다 영원은
모든, 들과 온갖, 들이 모든, 이며 온갖, 이자 하나, 가 되는 막대한 시공간이다
남자가 이마를 들었고, 허리를 세웠고, 무릎을 펴며 일어섰고
이마에 묻은 흙먼지를 닦았고 걸어서,
지평으로, 지평 너머 초승달 지는 첫새벽의 안개 아래에 묻힌 폐허에 흩어진 유적의 돌기둥이 베고 누운 이른 아침에 햇빛 차오른 대지에는 하루의 힘이 자라면서 태양이 높이 뜨고 저물어서 나날이 지나가는 여러 밤이 오고 만월이 뜨더니 다시 캄캄해진 지평에 초승달이 꽂히는 새벽에 닿기까지,
마침내 영원으로, 전신을 밀며 걸어 들어간 일시와 돌문을 밀고 나온 여자가 오래전에 죽은 전신을 밀며 남자의 전신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일시가
일치한, 동일시에, 남자 안에서 눈 뜬 여자의
저, 눈에,
빛이.
위선환 시인 / 적(寂)
늦은 가을에 비추는 햇살이 기울고, 요 며칠 사이에 시든 풀잎들은 누웠거나 무심해서 자주 밟히는 무렵이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손짓을 하며 저 사람에게 물었고, 저기에 있는 저 사람은 조아리며 그 사람에게 물었지만, 거기에 있는 그 사람은 대답을 하지도, 다른 누구에게 묻지도 않았다. 미리 눈여겨본 하늘이 조용했던 것,
위선환 시인 / 자국
높은 나무가 운동장 가에 서 있다 해가 기울면 하늘이 낮아지고 낮은 하늘은 우듬지 끝에 닿는다 긁는 소리가 난다
어제부터는 날씨가 더욱 맵차고 하루해가 더욱 급하게 기울면서 하늘은 더욱 낮아져서 여러 번 우듬지 끝에 닿았고
듥, 듥, 긁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해는 지고 없는 겨울 저녁의 벌써 얼어붙은 하늘 바닥에 긁힌 자국이 여럿 나있다
위선환 시인 / 물빛
물에 담근 발가락 사이에서 은백색 비늘들이 자란다 물은 차고 찬 냄새가 난다
물에 손바닥 얹어서 자국을 찍는다 저기서 여기까지 찍힌 자국이 여럿이다
물에 바람이 스치면서 잔물결이 일어서 밀리는 물낯의 무늬가 잘다 조용하다
물에 비친 하늘은 개어서 환하다 물은 밑바닥까지 비치고 물과 하늘이 말갛다
물에 돌 던져서 부수었던 얼굴의 조각들이 가라앉아 있다 들여다보며 부른다
위선환 시인 / 여자와 물그릇이 있는 풍경
여자가 손가락을 만지더니 금색 반지를 뺐다 여자의 손가락에 금빛 햇살 오라기가 감겨 있다 '잎은 지고 없는 나뭇가지다 넓은 잎사귀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벗은 발로 걸어온 여자의 발바닥이 흙투성이다 땅바닥에 찍힌 여자의 발자국에 흙이 묻었다 '찬물 담아서 물그릇을 놓던 자리다 물그릇의 물빛 윤곽이 남아 있다' 이마는 희고 이맛살이 파인 여자는 눈자위에 실핏줄이 말라붙었다 속눈썹이 젖고 지금 운다 '동풍이 지나가고 젖은 구름이 걷힌 뒤다 갠 하늘에서 물냄새가 난다' 목 길고 허리는 가는 여자의 그림자 안으로 눈은 크고 어깨는 좁은 여자가 들어가서 눕는다 '물방울 여럿이 수면에 얹혔다 무거운 몇 개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다' 여자가 여기에 서서 건너다본 물 건너편에 어제 죽은 여자가 서서 여기를 건너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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