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목 시인 / 돼지를 꿈꾸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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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목 시인 / 돼지를 꿈꾸며
돼지가 되어 살아 보고 싶다.
돼지로 살다가 단 한번 갖은 양념에 절어 보는 갈비며 삼겹살 저 뜨거운 불판에 노릿하게 구워 먹히는 기름진 황천길이나 구경하고 때로는 컴컴한 비육 우리에 갇혀 디룩디룩 찌는 살에 한 세상 까맣게 잊고도 살다가
돼지처럼 죽어 보고 싶다.
정수리 곰배 한 대에 비명횡사 하더라도 내가 갈긴 똥물에 코를 쳐박고 말더라도 이 기다림의 뒷날 저팔계 같은 쇠발톱 하나 쥘 수 있다면 나날이 싸움이라면
이성목 시인 / 고로쇠나무
나무는 일생 동안 뿌리로 빨아 올린 물을 몸에 가두고 물 위에 이는 파문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나무의 몸에, 그러므로 마음이 출렁거렷던 흔적, 그것을 테라고 하자. 몹시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옹이라고 하자. 마지막 날의 테와 옹이를 만들기 위하여 솜씨 좋은 황천 친구가 찾아왔을 때 아버지의 내면이 순간 거세게 소용돌이쳤다면 몸으로 다 막아낼 수 없는 그 격량은 무엇으로 다스렸을까. 아무도 모른다. 나무가 가지를 들어 옹이를 열고 시원하게 소변을 보던 아침 앞소리 메기듯 개울이 곡소리 내고 갔다는 것 나무의 내면을 내가 깨끗하게 한 사발 들이켰다는 것 내 몸에 담은 물이 넘쳐 한없이 쏟아져 내렷다는 것 그것뿐, 휘청 나무가 옆구리를 잡고 쓰러진 후 물을 가두었던 저수지는 나무의 몸 어디에도 없었다.
이성목 시인 / 뼈다귀 해장국에 대하여
몸이 먼저 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대, 갈비뼈 같은 애인을 만나거든 시장 골목 허름한 밥집으로 가라 세상이 다 버릴 것 같았던 뼈를 거두어 세상이 다 버릴 것 같았던 우거지 덮어 불룩해지는 뚝배기 속을 보라 뼈는 입김을 뿜어 그대 얼굴 뜨겁게 만질 것이다. 마음이 벼랑 같아 오금을 접고 캄캄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정강이뼈 쓸어안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보잘것없는 뼈마디 하나가 얼마나 뜨거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뚝배기 두 손을 모아 감싸는 경배 그 손바닥 가득 번지는 것이 몸을 다하여 그대 만나려 하는 뼈의 몸짓이다. 그래서 뼈는 뜨거운 것이다. 한때 나도 여자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산 적이 있다. 무슨 짐승인지도 모를 뼈를 발라내어 뜨거운 신음을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 몸 속 가득 뼈를 숨겨 놓고 살 냄새 풍긴 적 있다. 그대, 갈비뼈 같은 애인을 만나거든 뜨거운 눈물에 뼈를 먼저 적셔라 뼈아픈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진국이다.
이성목 시인 / 길 밖의 모텔
그대 용서하기 위하여 새벽, 홀로 욕조에 앉아 때를 민다 축 늘어진 배를 씻는다
이렇게 뻔한 몸을 나는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나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대, 이 많은 먼지와 굴곡을 데리고 나를 다녀갔다는 말, 기억한다
그대 말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세상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미 제 몸에 길을 내는 욕조의 저 물결, 저 흔들림이 내 몸을 읽어 낸 상처임을 보여준다
이성목 시인 /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어둠에 등을 대고 부음을 듣는다 목덜미를 스쳐 어깨를 넘어가는 울음은 주름살 사이에 고여도 깊다 그렇게 떠날 것은 무엇인가 기별을 꽃처럼 전할 것은 무엇인가 맺혔다가 풀리고 풀려서 수런거리는 강물이 한 몸을 받아 철렁 내려앉은 봄날 낮고 아득한 흔들림에 귀 기울이는데 꽃잎 한 장 이마를 짚는다 그 찬 손에 화들짝 깨어나면 얼굴 가득 번지는 열꽃 붉게 피었다 져도 나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 듯도 하건만 사는 일이 이렇게 어둑해질 것은 또 무엇인가 당신에게 살을 석어도 모를 나는 누구냐고 자꾸 되물으며 여자가 아이를 지우고 돌아온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아파서 손 댈 수도 없는 멍이 배에 가득 번지는 것처럼
이성목 시인 / 모래시계
처음에는 한 알의 모래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모래의 서걱거림 모래의 쿨럭임 모래의 헛기침이 사라진 곳으로 가기를 원했다 더 이상 무너지지도 깨어지지도 않는 한 알의 모래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계는 모두 하나의 유리 감옥
낯선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질 여행의 종말 오로지 한 알의 모래인 세계가 무수히 많은 한 알의 모래들을 받아내는 참혹과 맞닥뜨릴 뿐
미지는 벌써 제 하반신을 모래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좁고 긴 도시의 병목을 안간힘으로 빠져나갔다 해도 결국은 다시 사막으로 되돌려지는 단지 한 알의 모래로 시작된 모래알 같은 열망이 시간에 금을 낼 수 있을까만
처음의 그곳으로 되돌아온 무수한 한 알의 모래들 한 알의 모래로 시작하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상반신을 바람에 날려버린 행상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성목 시인 / 개울물에 비추어 보다
새가 죽은 물고기를 밟고 간다 아가미에 꽂힌 발자국이 낚시 바늘 같다
나를 만나야겠다고 종일 바람을 따라 다녔다. 인두자국 같은 너는, 버려야겠다고 담뱃불로 살을 지졌다. 나는 물의 혀로 살았다. 늙은 수초의 허리를 핥아대며, 달팽이 귓속에 뜨거운 농담을 불어넣으며, 들과 길을 회유하며, 속이며, 녹이며, 나는 흘러왔다.
입안에 고인, 혀는 썩어 뭉개져도 뽑혀나가지 않는다.
흘러서 가는 곳을 모르는 내 시는 스스로 무엇을 비추어 깊어질까.
햇살과 물결을 번갈아 단근질하는 새의 혀 같은, 물달개비 싹이 내 아가미에 툭 꽂히는 짧은 통증에도 파르르 떨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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