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순원 시인 / 주먹이 운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30. 08:00
박순원 시인 / 주먹이 운다

박순원 시인 / 주먹이 운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다가오지 마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수분과 기름기가 엉겨붙어

숨을 쉬는 사람이다

순하디 순한 녹말덩어리가

파랗게 살아나서

독을 품고 살아나서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모름지기 운칠기삼이다

나는 개돼지를 막대기로

두들겨 패는 사람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오르고

또 오르는 사람이다

까마귀는 겉이 검다고

백조는 속이 검다고

비웃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쩝쩝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다

감자가 햇볕을 보고는

파랗게 독이 올라서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어짜피 운칠기삼이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반성하는 사람이다

감자전을 부쳐 먹고

감자탕을 끓여 먹는 사람이다

순하디 순한 감자만 골라서

갈아서 으깨서 먹는 사람이다

돼지 뼈다귀를 고아 먹고

미꾸라지를 갈아서

체에 밭쳐 먹는 사람이다

차가운 소주를 마시고

달콤하게 쓰러지는 사람이다

삶은 감자처럼 숟가락으로도

으깨지는 사람이다

어른 주먹만한 감자가

어른 주먹이 우는 것처럼

 

- 시집 <주먹이 운다> 중에서

 

 


 

 

박순원 시인 / 나는 새록새록

 

 

 새록새록은 무엇과 어울릴까 새록새록 꿈꾸다 새록새록 잠들다 새록새록 헤쳐 나가다 함께 가다 새록새록 봄이 오다 새록새록 까마귀가 새록새록 옛 사랑이 옛 사랑의 그림자가 새록새록 시계는 아침부터 새록새록 밤새도록 새록새록 스마트폰이 새록새록 새록새록 졸리다 힐끔힐끔 새록새록 가타부타 새록새록 새록새록 깨어나다 새록새록 피어나다 새록새록 바람이 분다 고추 먹고 새록새록 달래 먹고 새록새록 새록새록은 무엇과 어울릴까 새록새록을 어디다 갖다 붙일까 봄동이 새록새록 쑥 달래 씀바귀가 새록새록 시냇물이 새록새록 개구리가 새록새록 팔짝팔짝 새록새록

 

-시집,『에르고스테롤』,파란, 2018

 

 


 

 

박순원 시인 / 병아리 떼 쫑쫑쫑

 

 전화 한 통화에 닭 한 마리가 튀겨져 내 눈앞에 와 있다 이 닭은 33일을 살다 죽은 병아리다 닭처럼 보이지만 고도비만 병아리다 부화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태어나 위탁 양계로 길러진 병아리다 암평아리다 가슴살이 빈약한 수컷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었다 브로일러 사육 방식으로 자라난 암평아리다 가슴살 다리 날개를 위해 눈동자와 창자와 허파와 간과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 태어난 평생 낳을 달걀 난소를 가지고 태어난 암평아리다 왜 태어났는지 곰곰 생각해 볼 새도 없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털이 뽑히고 톡톡 머리가 잘리고 발이 제거되고 분주한 손길이 내장을 발라내고 핏물을 닦아 내고 위생적으로 깨끗하게 처리된 암평아리다 털이 뽑힌 뽀얀 병아리 시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돌면서 머리가 톡톡 잘리는 장면, 치맥이 되기까지 수요공급법칙 극락왕생

 

-시집 『에르고스테롤』, 파란, 2017

 

 


 

 

박순원 시인 / 욕실에서

 

 

내 칫솔은 초록색이다

참 예쁘다 도마뱀 같다

손에 쥐고 있으면 파닥

파닥 움직이는 것 같다

치약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비누는 매끄럽고 향기롭고

면도 크림 샴푸 린스 샤워젤

풍성하게 거품이 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면 내가 중산층 같다

내 칫솔은 초록색이다

참 예쁘고 도마뱀 같다

손에 쥐고 있으면 파다닥

빠져나갈 것 같다

 

 


 

 

박순원 시인 /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1

 일제시대 태어났더라면 나는 친일을 했을 것이다 아니 친일할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일본 사람한테 잘 보여 한몫 잡을 수 없을까 아니면 일본 사람한테 잘 보여 한몫 잡은 사람한테 잘 보여 조그만 몫이라도 챙길 수 없을까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하에서 은밀히 떠도는 독립운동 독립투사 임시정부 이야기 따위야 현실감 없는 먼 나라 딴 나라 이야기로 귓등으로 흘리며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을 것이다 총독부에 다니는 사람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일본어가 유창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을 것이다 청요리를 먹고 싶었을 것이다 신사참배하러 가는 긴 줄 속에 있었을 것이다

 

 2

여기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나는 한밤중에

카드를 긋는다 내리긋는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바람 소리는 불변할 것이다

한밤중에 나는 카드를 긋고

찌릭찌릭 혓바닥처럼 올라오는

계산서에 날아갈 듯 사인을 하고

마지막 장을 떼어 꼬깃꼬깃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택시를

잡아탄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나는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갔다가 다른 택시로 갈아타고

청주로 간다 통행료 만 원은

현찰로 내고 택시비 십이만 원은

또 카드로 긋는다 별일

없을 것이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이 정도쯤이야 음냐음냐

한동안만 죽은 듯이 살면

대한 사람 대한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서

 

 


 

 

박순원 시인 / 친구

 

 

 초등학교 4학년 때 조용하고 조그맣고 깡마르고 빡빡 머리에 꼬지지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들끼리 몇 명 머리를 맞대고 킥킥거리며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다가와 그 친구에게 아버지 뭐 하시냐고 친구는 그냥 웃기만 했다 농담처럼 묻던 선생님이 재차 묻고 정색을 하면서 물었는데도 웃기만 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묻자 웃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두드려 패면서 물었다 맞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두드려 패다가 선생님이 분이 안 풀려 식식거리고 있는데 들릴락 말락 입술만 달싹달싹 똥구르마 끌어요

 

 


 

 

박순원 시인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저녁 약속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쯤이야

두 점쯤이야 석 점쯤이야

하늘을 우러러

온통 부끄러움

 

죽어 가신 모든 분들을 일일이 조문하고 조의금을 보내기가 너무 벅차지만 건너뛰고 모른 척 지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정성껏 힘닿는 대로 마음 전하실 곳으로 마음을 또는 마음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

잎새에 이는 바람

별을 노래하는 마음

잎새에 이는 바람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이

스치운다 스치면서

 

 


 

박순원 시인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05년 《서정시학》 겨울호에 〈장례식장 가는 길〉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 <주먹이 운다> <그런데 그런데> <에르고스테롤> <흰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등. 〈박두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