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우 시인 / 밤하늘의 트럼펫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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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우 시인 / 밤하늘의 트럼펫
밤하늘이 당신의 취향입니까
골목 가로등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서 있고 흑백의 서늘한 그림자가 속눈썹을 스치는, 오래전 표정이 골목의 맨 뒤에 있습니다
두서없는 길의 시작은 미련 때문 한 쪽만 푸르다는 것은 위험 할 수 있습니다
잘려버린 대나무 숲 길냥이 울음이 바람소리 속에서 뚜렷합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아서 별이 쏟아져 내립니다
밤이 밤을 다시 풀어 쓰고 마지막에 두는 말, 누구도 울지 말아요
지난 일은 깜빡할 사이 희미해지는 티끌입니다 밤이 기울어진 쪽으로 생겨난 절취선
그 밤입니까
어둠의 쇄골을 문지르며 밤이 먼지처럼 뭉쳐지고 밤에 밤을 덧대면 하룻밤이 생겨납니다
정선우 시인 / 몽당연필
접은 노루꼬리처럼 왼쪽 눈썹 끝을 밀어 올린다 오늘 운세에 트집을 잡는 모호한 바람이 왼쪽 눈썹에 걸린다 부추꽃 같은 눈 슬픔은 언제나 애매모호하다 뽀족한 꽃잎에 흔들리다가 둥근 꽃술 가장자리에 가서 앉는다 그려놓은 눈동자 속의 또 다른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내 안의 나를 손짓하고 있다 함부로 그린 불완전 이름씨 나는 불완전을 지우려고 멀리 있는 동사를 끌어온다 분명한 흔들림이 나를 부추긴다 연필은 아직 불완전 이름씨에 있다 눈을 그리다가 눈 속에 고이는 바람의 우물 하나 길어 올린다 어쩌다 뿌리째 흔들린다 우물에 내려놓은 두레박은 바닥에 아직 걸려있다 오래전의 침묵이었을까 우물은 두레박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정선우 시인 / 기린을 기다리는 해변
의자는 조금 기울어져 있다 저것은 기린이 아니다
한쪽으로 구부러진 흰 소라껍데기가 빛난다 귀를 기울여 소리를 쏟아낸다
수평선이 상하로 펄럭인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해변에서 해변까지 뛰어가는 몇 개의 발자국
기린의 형식으로 목을 늘어뜨리고 몸을 최대한 낮춘다
어두워진다 기린은 아직 오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 파도
한번 가서 다시 오지 않는
모래 글자 위에 찍힌 발자국들
사라진 글자 위로 모래바람이 분다
의자는 더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기린이 아니다
정선우 시인 / 박쥐바람
나는 박쥐의 자세로 매달린 바람 길을 찾아 읽는 초음파 멀리 있는 표정을 찾아요 지상의 이면들은 모조리 행방을 숨겨요 돌아보는 얼굴로 서로를 모른 채
여러 날 툭-툭 병든 도토리만 떨어져요 희박한 날개로 허공을 한방, 먹여 봐요 흉터처럼 얼룩덜룩 하지만 상관 안해요 나를 기억할 각별이 있기나 할까요
거미줄에 거미도 없는 요요한 밤 누군가 소리를 질러요 귀가 따가워요 비등점 아래의 달집처럼 뜨거워 발톱이 찢어지고 심장은 부풀어요 중심부터 타들어가고 있어요 구불구불한 연옥煉獄 같은,
타들어가 울지도 못하는 나는 백 년 전의 집터처럼 나쁜 꿈처럼 쓰러져요
가라앉는 지상의 호흡을 삼키며 까마득한 초음파는 수없이 오다가 사라지고
비문은 한 줄이면 충분해 다시 읽지 않으면 해요 치환되지 않을 마지막 자리 거기에,
정선우 시인 / 숨은그림찾기
늦은 저녁을 접는다 서랍에 잠갔다 창틈 모서리에서 귀뚜라미가 울었다 손바닥 같은 울음 더 자랄 것도 없는 요약처럼 몇 소절의 울음이 뻗어서 담장 넝쿨이 되었다 아주 짧고 간단하게 줄기를 뻗었다 낮은 어둠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밤의 경계를 물고 있다
마음 한 편이 뻐근하다 슬픔의 방향은 늘 편도였다 다가온 우두커니 모질게 쓸어내지는 않았다 결핍의 이름 몇 개 수첩에게 주었다 저녁은 아직 게으르고 수렁 깊은 늪 속으로 달을 먹은 구름이 따라온다 어둠은 물컹한 뒤꿈치를 들고 서서 자는 것들을 불러 모은다 지나간 뒷모습은 지나간 적이 있다
정선우 시인 / 이미지, 몽(夢)
눈빛은 심드러안 더위를 물고 있다 맞짱뜨는 자전거 사이를 어설프게 끼어드는 얼굴, 횡단보도에 뛰어드는 완전히 다른 수요일 건너편 눈치를 켠다 신호등을 깨문 입술은 귀의 시위를 벗어난다 무릎 우두둑 노란 하늘을 일으킨다
입술을 비집고 올라온 송곳니 꽃향기를 피우며 싱ㅅ깅하게 외출한다 손목을 잡아끄는 엄마는 공원이 취향이다 어슬렁거리는 눈동자는 주인 없는 풍선을 잡고 노래는 끝났으니 산책해야지, 꽃무늬는 여름을 건너간다 게으른 운동화를 벗어둔 맨발 꾹꾹 혼잣말을 디디고 떠났다 배꼽을 숨기기 좋은 곳을 찾기 틀렸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얼룩 고양이의 발목을 잡은 나팔꽃이 진다
허물을 벗은 검은 비닐봉지, 목젖에 잠겨 무슨 말을 하다가 만다 소나기 죽비처럼 후두둑 등짝을 내리친다
정선우 시인 / 물고기자리 여자
설핏 잠이든 새벽 잠옷의 덩굴무늬가 수심으로 뻗어가는 꿈이었다 방문이 삐꺽 열리며 지느러미가 사라진다
둥근 탁자에 앉아 소금도 없이 달걀을 먹는다 삶은 노른자 가루를 어항에 뿌린다
어항 수초들 사이로 물고기들이 몸을 숨긴다, 나의 슬픔은 몇 마리 남았나
보고 있는 건 물고기만 그려진 그림책
아직 남은 슬픔이 유효한지
가까스로 헤엄치는 법을 알았다는 듯 죽은 물고기가 수초를 빠져나온다
어디든 가야 한다는 것처럼
정선우 시인 / 식물도감
노란이끼버섯이 피었다 저것을 태워 먹으면 울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다 보여주는 건 절망적이다
4시가 지났다고 생각했다 숲의 소실점에서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가 팔을 벌려 알려 주었다
귀를 닮은 머위 잎, 바짝 말려 먹으면 흉이 사라진다고 했다 안개가 머위를 덮치고 귀는 희미해져 갔다 귀가 더 커졌다
이 숲은 누구의 것일까 배가 고파왔다 첫 표정이 기분을 좌우했다
햇살은 숲을 키우고 한낮을 다독이는 일에 열중했다 안개가 사라지고 여뀌 꽃이 흐무러져 있다 삶아 먹으면 피가 멈춘다 했다 무심결에 베여 손가락 하나를 잃은 소년을 알고 있다
벌깨덩굴, 처녀치마, 홀아비꽃대, 광대수염 너희의 시작과 끝, 접혀 있는 페이지마다 그늘이다
손금을 쥐고 최소한으로 피었다가 최 대한 흔들려 보는
맨발로 일어서는 나무가 경계를 지웠다 산딸나무 가지 끝에 얼굴이 사라졌다
정선우 시인 / 지심도 동백
바람은 몇 번이나 다녀간 걸까 찰나라는 말을 삼킨다 섬과 섬 사이에 있던 안개가 전하는 바람을 먹고 해풍 위에서도 그림자는 자라고 있다 붉음에 지쳐 자지러지는 핏빛 모가지는 제 팔 아래 떨어뜨린 생의 환멸이다 붉은 소인이 찍힌 부고다
죽음을 껴안은 파랑의 보폭 위로 다시 피는 후생, 파도는 혀끝에 목숨꽃을 물고 치명을 피워 올린다 불온한 포말이 떠돌고 있다 발설하는 절명, 쓰러지며 반복되는 파도, 파도
동백 촛불이 켜지고 유혹의 표정으로 케이크는 붉어지고 있다 통째로 떨어질 맹세는 벼랑 아래로 뛰어들고 모가지 붉은 탄원은 유품으로 박제되는,
더 이상 울지 않는 섬, 불현듯 사랑은 그 절벽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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