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재훈 시인 / 눈깜짝할새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31. 08:00
최재훈 시인 / 눈깜짝할새

최재훈 시인 / 눈깜짝할새

 

 

눈 깜짝할

그 비좁은 틈새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눈 깜짝할 시간을 쪼아먹고 사는 새

 

조금의 시간도 내놓지 않으려

눈 부릅뜨면

동공 가까이로 뾰족한 부리 내미는 새

 

눈이 따갑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도

꿋꿋이 참아보는 새

눈깜짝할새가 열리고

그새 그 새는 날아들어 오고

 

누구도 보지 못한 새

누구나 스스로 새 모이가 되어 키워야 하는 새

 

갓난아이의 몸속에 날아들어 가

무럭무럭 크고 있는 새

아이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눈깜짝할새 모이가 바닥난

노인의 눈 속에서 죽어가는 새

새를 꺼내

 

창밖으로 날려 보내주고 싶지만

내 머릿속으로 날아든 새

새장처럼 빠져나갈 수 없어

밤새 날갯짓하는

밤새

 

영영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죽은 사람의 부릅뜬 눈

그 눈 속에서 그칠 줄 모르던 눈이 그치고

쌓인 눈 속에 파묻힌

새의 둥지

 

새는 어디로 갔을까

 

페루로 날아갔을까*

페루는 얼마나 큰 눈이길래

눈한번깜짝할새

세상 모든 새들이 날아들어 갈 수 있을까

페루의 글썽이는 눈가엔

죽은 새의 해변이 펼쳐지고

 

새의 사체들이

지구 반대편 바닷가까지 밀려온다

하얀 날개 부서지며

 

내 안까지 밀려왔다가 어느새 쓸려간다

쓸려간 자리에 하얀 거품 잠시 머물며

내 옆을 지켜주지만

 

드높은 하늘 먼 수평선 어디를 둘러봐도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최재훈 시인 / 새장으로 손쉽게 선풍기를 만드는 법

 

 

새장 안에 죽은 새를 가둘 것

죽은 새가 자신이 죽은 새인지 모르게 할 것

이백이십 볼트 전기 고문으로

살아있던 새의 고통을 떠올리게 할 것

통증의 추억이 날개 뼈 마디마디까지 흐르게 할 것

이때 미래는 살아있는 것처럼 박제할 것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죽은 새가 살기 위해

뼈만 남은 날개를 파닥이게 할 것

이때 반드시 모이를 던져줄 것

바람이 빠져나간 공기의 사체를 던져줄 것

공기는 인공 미끼처럼 꿈틀거리게 할 것

부리 없는 새가

모이를 향해 허공의 부리를 내밀게 할 것

모이는 조금만조금만 더 날개를 퍼덕이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에 둘 것

날개의 퍼덕임에 모이가 공중으로 흩어질 때

다시 모이를 던져줄 것

자신의 뱃속이

허공의 뱃속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할 것

허공의 뱃속에서 죽은 허기가

갑판 위로 끌려 올라온 생선처럼 팔딱거리게 할 것

강, 약, 중간, 약

고통에 길들여지도록 고통의 강도를 조절할 것

강에서 약으로 중에서 약으로 돌아왔을 때

약이 평화롭고 무감각한 일상이 되게 할 것

대가리가 없어 주위를 둘러볼 수 없는 새를 위해

새장은 회전모드로 할 것

유리창에 살아서 날아가는 새들의 환영을

언뜻언뜻 비춰줄 것

새장 밖은 또 하나의

거대한 새장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새장 밖을 향해 끊임없이 파닥이게 할 것

파닥거릴 때마다

흩날리는 작은 먼지와 뒹구는 머리카락 들이

잃어버린 자신의 깃털임을 모르게 할 것

스위치를 켠 채

거대한 새장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신(神)은 새의 신이 아니며

작은 새장 앞에서 웃통을 벗고

축 늘어진 살덩이를 드러낸 저 볼품없는 신이

새의 신임을 모르게 할 것

이때 새의 신도 거대한 새장의 신도

새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땀에 전 혓바닥을 말리기 위한 것임을 모르게 할 것

어느 순간 파닥거림은 고통의 몸부림이 아니라

신을 향한 신성한 막노동임을 깨닫게 할 것

생명의 열기로 뜨거운

이 불임의 계절이 끝나면

새장은 다시

어두컴컴한 망각이라는 창고로 옮겨지고

그곳이 잠시 동안 머무르게 될

꿈도 미래도

고통도 없는 세계임을 모르게 할 것

창틀에 한쪽 날개가 낀 바람이

밤새 울어대는 긴긴 겨울밤은 오고

새장 안의 죽은 새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환청임을 모르게 할 것

자신의 굳어버린 날개가 환청 속에서

아직 퍼덕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허공의 부리에서 그리움이란

헛것이 침처럼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기름때로 찌들고 있다는 사실을

새도

새가 아닌 어느 누구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최재훈 시인 / 인력

 

 

한 무리의 사내들

불빛 주위를 방풍림으로 둘러서 있다

저마다 입김 하나를 머리 위에

텅 빈 말풍선으로 띄워놓은 채

불을 쬐고 있다

 

불은 활활 타오르는데

언 땅을 향해 고드름처럼 길어진

그들의 눈빛은

좀처럼 녹아내리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자 한 사내가

흠칫 놀라며 예리하게 날 겨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뚝, 너무 쉽게 부러져

바닥에 산산조각 난다

 

저들의 연약한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난 주머니에서 꺼낸

손바닥을 그들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정말이지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군요’

난 가느다란 입김으로

말풍선 하나를 띄어놓고는

방풍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데

아무리 쬐어도

몸은 좀처럼 데워지지 않는다

이네들의 온기를 다 빼앗고

저만 외로이 뜨거워진 걸까

 

불은 자신의 차가운 영혼에서

뜨거워진 몸을 떼어내려

쉴 새 없이 버둥거리는데

 

사내들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더 이상

쉽게 타오르지 않으려는 걸까

 

그때 난 마지막 사내가 불 속에

그림자를 던져 넣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를 삼킨 불이

검은 불꽃을 화르르 피워내는 것도

 

‘정말이지 유난히 춥…’

내 말풍선은 공중에 얼어붙어 있다

난 품속에 그림자를 숨기고

무리에게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친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흙탕물 속을 휘젓는 빗줄기처럼

섞이고

풀어지고

마침내 난 희미해져 간다

 

불빛 속에서 타다 만 그림자를 건져낸다

황급히 발목에 감아보지만

그것은 이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 안에도 이제서야

젖은 나무토막처럼 부풀어오르는

그 무엇이 생긴 걸까

 

아침해를 수없이 실어 나르고

낮과 밤을 들이부어도

이곳은 언제나

이른 새벽 공사장

 

이쪽을 향해

못박을 듯 쏘아보던 눈빛 하나가 순간

못대가리처럼 힘없이 구부러진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3월호 발표

 

 


 

 

최재훈 시인 / 폭설 번역가

 

 

창밖에 눈은 내리고

우린 카페에 앉아

쏟아지는 희고 깨끗한 눈송이들을 바라본다

 

눈은 바람에 아무렇게나 흩날리지만

눈송이들에게도

흩어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거겠지

그러므로 눈은 결국 가라앉고 마는 것

어쩌면 폭설은 적나라한 바닥을 감추기 위한

거대한 무의미일지도

 

설사 바닥이 모든 문장의 무덤이 될지라도

바닥은 그러나 공중에서 방황하는

희고 작고 가벼운 글자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 줄 것이므로

한 글자도 씌어있지 않은

심지어 그날의 날씨도 날짜도 씌어있지 않은

우리의 낡은 일기장처럼

 

얇은 유리창을 여러 장 넘겨봐도

눈 내리는 페이지는 끝나지 않는다

눈이 ‘눈’이라는 글자가 되어 유리창에 마구 찍혀있고

‘눈’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

저렇게도 많은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우린 저 많은 문장들 중에

단 한 문장도 읽어낼 수 없다니

 

내 앞에 앉은 너의 머리 위에도

눈은 쌓이고

너는 곧 눈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겠지

보이지 않는 건 모두

지금 눈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폭설의 페이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눈 속을 파헤치며

너를 찾아내려 하다가

네가 아닌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않으려

눈을 마구 파헤치는 사람이 되어가겠지

 

너무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눈은 내렸고 또 내릴 것이기 때문에

 

백지 만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외국어 서적 한 권을 앞에 두고

늙은 번역가는 평생

단 한 글자의 외국어도

번역하지 못한 것 같은 심정이 되어버리겠지

 

폭설을 모두 걷어내면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 같은

 

눈 내리는 마지막 페이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에서 떨어지는 희미한 눈빛들

그 눈빛들 이제 눈을 털고 일어나

어둠에 기대서 주는 밤

 

툭툭

자신에게 악착같이 매달리는 의미를 털어내고

마침내 저들은

외롭고 앙상한 하나의 글자가 될 수 있을까

 

외국어 사전의 찢어진 한 페이지처럼

지금 난 카페에 홀로 앉아 있다

 

나를 번역해 줄 유일한 사람이

너였다는 걸

조금씩 잊어가면서

조금씩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가면서

 

-계간 『시산맥』 2023년 가을호 발표

 


 

 

최재훈 시인 / 활어

 

 

왜 말이 없어.

해 저무는 바닷가를 걸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배가 고팠다.

이곳은 활어회가 유명했다.

 

미역 줄기처럼 늙어버린 해녀들이

갯바위에 걸쳐 있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닥불 앞에서

매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소금에 절인 무언가를

자꾸만 불빛에 던져 넣었다.

 

수평선에선 눈먼 한치 떼가

인공조명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어둠에 빠져 방향을 잃은 배들은

등대의 붉은 눈을 맹신했다.

 

무엇이 별빛을

이곳까지 끌고 오는 걸까.

가지런하게 찢긴 흰 살점들을 보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눈이 맑은 관광객은 자연산을 원했다.

 

잿더미를 발로 차며 청년들은 일어났다.

신발을 벗어 둔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그가 바라보고 있었다.

 

먼바다에서 난민처럼 떠밀려온 파도가

그의 발목을 잠시 어루만졌다.

버려진 신발을 품에 안은 파도는

곧 추방되었다.

 

그날 밤 수조 안에서

울고 있는 그를 건져냈다.

 

난 관광객처럼 맑은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왜 말이 없어.

 

 


 

 

최재훈 시인 / 아름답고 푸른 농구공

 

 

바닥이 출렁인다

어디까지 떠내려갈까

생각이 무거워지면 돌아올 수 없다

 

저 아래 누군가 목구멍을 열고 쳐다본다

줄 듯 말 듯 준 것인지 만 것인지

매번 추락하지만 걷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지나가야 한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충실한 배역이어서

당신은 주구장창 드리블을 할 수 있는 것

 

절벽 끝에서 줄넘기를 한다

마치 줄넘기 안에서 줄넘기를 하는 사람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벼랑을 넘고 넘어

벼랑 끝에 서 있어야 하듯

 

천장에 매달린 당신을 온몸으로 받쳐 주던

의자가 발끝을 살짝 옆으로 내밀자

드디어 비틀비틀 춤은 시작되는 것

 

아름다운 춤은 당신을 휘감는

독이 달달한 짐승

‘지겨워,지겨워 죽겠어’에 맞춰 춤을 춘다

입술이 터지도록 입맞춤을 한다

 

밤이나 낮이나

탕,탕,탕,탕,탕……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불사조와 왈츠를

 

춤을 멈추면 돌아올 수 없는 그곳에선

쇳덩이 같은 생각이 녹물을 삼키고

빙하 같은 손등이 끝도 없이 떠내려가고

 

당신은 동그랗게 혀를 말고 굳어버린

독을 삼킨 침묵

바닥에 버려도

버려도 되돌아오는 것들의 모든 몸부림

 

 


 

최재훈 시인

1971년 경남 김해 출생. 경북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2018년 계간《시산맥》으로 등단. 제3회 정남진 신인시문학상 수상. 문학동인 볼륨 제3-4대 사무국장 . 회사원(현재 제주 서귀포에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