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남 시인 / 말은 바르게 해라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31. 08:00
김명남 시인 / 말은 바르게 해라

김명남 시인 / 말은 바르게 해라

 

 

자신의 고갱이었던 심지를 갉으며

한 자루 초가 탄다는 것은

세상을 밝히려는

거룩한 희생이 아니다

 

촛농으로 애써 삶의 길이를 연장하려 몸부림치지만

마음의 속불꽃마저

결국 저 빛 맨 끝에 있는 어둠일 뿐

 

제 살이 타들어갈진대

거기에 무슨 아름다운 형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 힘줄을 타고 오는 불꽃이여!

 

달려드는 이리 떼에게 뜯긴 비둘기의 핏빛 일몰

그게 너다

촛불이다

 

 


 

 

김명남 시인 / 계양산 하느재

 

 

푸른 하늘은 커다란 멍자욱이다 귀만 열고 온몸을 닫는다

멍자욱 따라 실려 오는 소리를 듣는다

잎새 소리 빛살 쏟아지는 소리 바람이 길을 여는 소리

구름까지 부딪는 소리

 

하늘은 구름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

하늘은 구름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는다

 

하늘은 다만 구름을 토해낼 뿐이다

구름은 하늘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인천민족작가회의 21인 신작 시집 <꽃이 핀다 푸른 줄기에>

 

 


 

 

김명남 시인 /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

 

 

문득

깊은 새벽홀로 깨어

책상귀에 턱을 괸 채

귓속을 파고드는 새벽별들의 쑥덕거림과

심장을 후벼파는 밤이슬의 맵고 찬 사연을 듣는다

두려움 가득 안고 적요 속으로 투신하는 가느다란 떨림을 본다

 

훔친 기억으로

진실 밖에서 허상만 긁어모았을 쓰디쓴 시간에 대하여

두 손 고이 모은다

 

안일을 이유로 정면을 피해 옆으로 비켜나 있지는 않았는지

달빛을 쬐며

어둠에 먹힌 빛에 대하여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몽글몽글함과 촉촉함을 유지해야 하는지

사르락사르락 읊고 있는 새벽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김명남 시인 / 보리

 

 

왈츠를 위해 태양에게 햇살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 푸른 생살을 위해 바람의 아픈 눈동자를 해치지 않겠다

까끄라기의 요란함도 목울대로 넘기겠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의 틈새를 노리지도 않겠다

 

봄을 부르지 않겠다

얼음을 깨고 누군가 봄을 건져올려도

발부리로 파고들던 검은 바람에게

뒷걸음으로 가서 투명해지겠다

 

 


 

 

김명남 시인 / 훠이훠이 가다오

 

 

가시 돋친 밤송이가 아가리를 벌려

탐스런 밤알을 보이면

동네 어른들은

부엉이새끼 방귀 뀌어서 그런 거라 했다

 

그래서인지 농촌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은

입을 벌려 방귀를 뀐다

거기에 감춰진 속창자주름은 보지 못한 채

 

가을들판이

황금들녘이라고 풍요롭다고

고즈넉한 것이 평화롭다고

염장지른다

 

감탕밭*에 두 발 딛고 선 사람들

뼈마디에 바람자국

흙빛 얼굴엔 떡지떡지 빗물자국

내리는 눈에 휘어진 나무동아리처럼

등골이 휜 콧잔등을 보라

 

풍경 너머

잡티뿐인,

저 너머너머

찢긴 얼룩 밖에 없으니

다시는 오지 말고

훠이훠이 멀리 멀리 가다오

 

가을은 독살스러울 뿐이다.

 

*감탕밭: 곤죽 같은 진흙 밭

 

 


 

 

김명남 시인 / 완벽해진다는 것

 

 

1

청춘을 담보로 감정을 함부로 휘두르던 시절은 갔다

감정은 온갖 병에 휩싸였고

허울은 지친 영혼을 꿰뚫었다

생밤 같던 시간

그 시간을 구부려 감히 생의 주름을 펴려 하다니

낙엽에 마음 흔들릴 때는 지났다며

눈가에 맺힌 물기를 지우라고 한다

잎새가 가을을 채워주리라는 여름날의 약속도 잊으라고 한다

휘어진 길 등성이에서나마 짧은 식사라도 챙기며

스스로를 밝히라고 한다

다가올 이별과 악수하라고 한다

입덧 같은 길을 달려가 매달려도

노래는 더욱 쓰디쓸 것이며

직선은 결국 곡선이 될 거라 한다

그러니 이제

곡선으로 한눈팔겠다

곡선으로 옆길로 새겠다

상냥함을 하나씩 하나씩 팔아야겠다

다정함을 하나씩 하나씩 흩트려야겠다

언제나 싸움은 나의 싸움이었고

눈물 없이

이제 그만 소년을 놓는다

나가지 않겠다고 뻗대고 있는 소년을 버려야겠다

마구마구 내다버려야겠다

 

2

겨울잎새처럼 바스러질 듯 마른 빛깔로 너에게 간다

소태 씹은 눈빛으로 나무껍질 되어 네 앞에 나타난다

너의 촉촉함으로 나의 건조함을 태우려

오천 년쯤 됨직한 달빛을 뭉쳐 너에게 간다

나의 여윔이 달의 소행쯤으로 치부될 수 있도록

내 신음을 매만져다오

조붓하면서 드넓은 너의 안에서 맘껏 버무려지도록

내 뾰족함을 다듬어다오

언어의 뼈를 곱게 빻아

서로에게 젖으려 날개를 우아하게 펼쳐 보이지만

결국 밀어 넣는 것은 날개로 할퀸 자국뿐

표정을 꿰매고 또 꿰매 낯설음을 어울림으로 바꾸는 것

흔들면 흔들리고

잡으면 잡혀주마

굳건하던 동공이 잠시 움찔해도 손을 놓지 않는 것

그늘에 버려진 절정을 카타르시스로 되살리는 일

볕을 보태 그늘을 떠받치는 일

모두 전율이다

 

3

서성이고 싶지도 맴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그날 달라붙는 고단함 속에서도

미처 가보지 못한 방향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겨울이 닥치기 전

잎 지는 짧은 가을볕이라도 쬘까 싶어

그 방향으로 탈주를 감행했다

가슴 두근거린 것도 잠시,

결국 붙잡혀 되돌아왔다

평온을 흠집 내는 건 예견됐던 일

내가 온전히 나였기를 바란 게 무슨 큰 잘못인양

그렇게 내 끝물의 시작은

그 누구에게도 응원받지 못한 채 미완의 기척만 낳고 장렬히 죽어갔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우리는 서로에게 돌팔매질하듯 말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지 않았다

 

4

내가 잊었었다

겨우겨우 안고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지 말았어야 했다

찬바람이 흘러내리게 틈을 유지해야 했다

아무리 밤하늘에 별들이 출렁거려도

눈 뜨지 말고

멈추지 말고

절뚝거려야 했다

내가 순간 풀어졌었다

사랑이, 허기를, 달래주리라

내가 짧았다

난 병실이었고 넌 환자였다

퇴원환자는 병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지겠지

아니 간직되겠지

난 사랑 같은 건 믿지 않아

단지 연애를 믿을 뿐

어쩌면

잊혀지는 것도

간직하는 것도 내겐 어울리지 않네

 

5

악이 평범하다면 선은 특별하다는 것

세상이 얼룩진 건 특별함이 부족해서인가

평범함이 넘쳐서인가

빨래 마르는 소리조차 비명으로 파고드는 완벽

화려함에 갇힌 허름함

마지막 언덕바지려니 했던 우듬지에

앓고 또 앓던 가슴앓이가

도드라진 능선으로 펼쳐지는 게

우리 사는 모습 아니겠냐고

순간순간이 절실함이었다고

난폭한 시간 앞에 어떻게 절실하지 않겠냐고

절실함은 있음과 없음이 한몸임을 분명히 한다

 

6

너의 파도에 나의 뱃전이 흔들린다

아파하지 마라

 

 


 

김명남 시인

1969년 강릉에서 출생. 청주교육대학 졸업. 2000년 《작가들》 여름호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 인천작가회의 사무국장을 역임. 현재 인천에서 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