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태운 시인 / 염화험칼슘 보관함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31. 08:00
안태운 시인 / 염화험칼슘 보관함

안태운 시인 / 염화험칼슘 보관함

 

 

 툭툭 눈송이는 함 위로 떨어지는데, 그렇게 쌓이는 눈, 쌓여가는 눈, 눈을 밟는 고양이의 발자국, 고양이는 지나 갔나, 또 다른 고양이가 나아가고 있었나, 그 시간은

 

 흐르고, 문득 염화칼슘 보관함을 여는 네 손이라니, 열 때 조금은 흩날려 내리는 눈, 염화칼슘을 얻은 네 표정, 이후 닫히는 함. 그 후 눈은 다시 쌓이네, 쌓이다가 녹다가 그렇게 눈의 계절은 흘러가고, 날씨는 따뜻해지고 있었는 데, 너는 거닐었고, 거기 보이는 염화칼슘 보관함, 햇볕이 내리쬐네, 숱한 손발이 닿았을 테고, 생물의 흔적은 남아 있기도 했을 테지만, 여름이 되어가고 있으니 자국은 찾 아보기 어렵고, 함을 열 수 있을까, 놀랍게도 여름이 되어 서 네 손 이 닿을까 열릴까, 눈을 털듯 하다가 함을 열어보 는데,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열어보니 그것이 있군, 그것 이야, 그것을 뒤로한 채 너는 골목을 거니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었고 ······

 

 


 

 

안태운 시인 / 동공

 

 

당신은 동공으로 우리의 거리를 나타냅니까

동공의 검은 빛이 붉은 실을 당겨 눈꺼풀을 덮을 때

눈은 차츰 저물어 갑니다

동공이 당신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하루가 목욕하고 있습니다

비가 거리를 앗아 갈 때까지

그 사이 당신의 종아리에 커튼의 음영을 그려 넣습니다

감지되는 나와 지향하는 나는 한 몸으로 서로를 시늉하고 있습니다

붉은 실은 헝클어지고

나의 각성은 당신의 반경 내에서 묘연합니다

내 정체를 보여 주겠습니다, 당신이

사라졌음을 증명해 보인다면

그 동공이

 

 


 

 

안태운 시인 / 나는 새벽에 대하여 말했을 뿐인데

 

 

내가 말하자 그는 나타나고 있다

나는 새벽에 대하여

말했을 뿐인데

새벽과 함께 사라진 얼굴에 대하여

그러나 그는 출몰하고 내가 말할 때마다

나는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와 함께하면서

경내로 진입하고 그러면

그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 같고

더 생생해지고

그러나 그는 내 형체를 모르고 있다

눈앞을 지우면서

걸을 때마다

나는 산 채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고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새벽은 이미 늦었으므로

나는 걸터앉을 곳을 찾고 있다

정자가 놓여 있는 곳으로

나를 옮겨가고

그곳에서 바깥의 풍경을 조망할 때

내 입은 물러나고

그러나 그는 내 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옛날 사람인가

그의 얼굴이 내 입을 닫고 있다

 

 


 

 

안태운 시인 / 심을 수 있는 마당

 

 

무엇을 심어도 되겠지

심을 수 있는 마당

새로운 날씨가 된다면

새로운 곤충이 온다면

심을 수 있는 마당

돋아나는 나물을 심고

그 나물 속으로

내 발자국과 현기증이 들어간다

심을 수 있는 마당

내 방을 심고

우주본도 심었다

파헤쳤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 문학과지성사, 2021년

 

 


 

 

안태운 시인 / 창문을 열어놓을 때 곳에 따라 비

 

 

 녹음이 흐르나. 여름이 흐르려나. 묘지와 입술이 흐르나. 창문을 조금 열어놓은 사이 흐르는 것들. 사나흘이 흐르고 조각과 진창이 흐르고 창문을 조금 열어놓을 때 곳에 따라 비가 내리고 빗물이 흐르는 사이 너는 창 문 앞에서 창문을 조금은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창문을 열어놓을 때 너는 조금은 나갈 수 있었고 다시 조금은 들어올 수 있었고 너는 망설이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방이 흐르려나. 방이 흐르면 너는 놀라 밖으로 나갔다가 창문으로 숨으려나. 돌아볼 새 없이 방은 흐르고 사나흘이 흐르고 너는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로 창문 속에서 머물고 있었다. 극장이 흐르고 있었다. 생물이 흐르고 있었다. 곳에 따라 촌락과 강변이 흐르고 있었다. 때에 따라갈 곳이 흐르고 있었다. 갈 곳을 잃고 있었다. 너는 있었나. 너는 없었나. 너는 눈이 없었다. 너는 흐를 때 눈이 없었다.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 문학과지성사, 2021년

 

 


 

 

안태운 시인 / 안개비

​​

창밖을 보렴

너는 안개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함께 사는 동물에게 말했지

창밖을 봐

하지만 동물은 창밖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곳으로 드나든 적은 없었으니까

대신 현관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지 네 무릎 위에서

현관을 통해 이곳을 오고 갔으므로

동물은 닫힌 문 너머 다가올 사물을 부르는 것 같다

사물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바라보면

너도 동물을 하염없이 바라봤어

하지만 동물은 네 눈을 피했지

동물은 인간이 아니니까 너는 계속 그 눈을 바라볼 수는 있었다

피하는 눈이라도

네가 오래 그러고 있으면

눈 말고 다른 부위에 닿을 수 있었고

너는 안개비 내리는 창밖으로 초점을 잃었다

 

 


 

 

안태운 시인 / 평화와 평화

 

 

조도와 습도가 일정한 식물원을 당신과 걷는다 하나의 품종만이 심어진 온실 하우스는 고요하고 징그럽다

 

당신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앞서 걷는다 나는 모르고 당신은 아는 말들 속에서 등을 보이며 걷는 당신의 뒷모습은 아름답고 엉망진창

 

식물원 밖엔 형체를 알 수 없는 석상과 이름 모를 식물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석상 앞에 선다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검다 순식간에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당신은 자꾸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뒤에 무엇인가 가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저게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 밤눈이 어두운 당신을 위해 플래시를 켜고 걷는다 한발짝 나아가면 한 발짝 밝다

 

무엇이 보여요? 그저 밝고 텅 비어 있는데 나는 무엇이라도 말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낀다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가 있다 무섭도록 닮은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하게

 

나는 당신을 위해 한 발짝 앞서 걷는다 두렵군요? 당신이 걸음을 멈춘다 나는 앞의 무엇을 향해 걷는다 빛이 걸음을 만들면서 걸음이 길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그러다 문득 내가 놓친 뒤가 신경 쓰이고

 

뒤를 돌아본다 당신에게 플래시 빛이 향한다 당신은 무릎을 꿇고 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토르소 빛이 너무 강렬해서 아주 텅 비어 있어서 당신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당신 앞에 내가 서 있다

비로소 평화롭다

 

내가 안녕이라 말하면 당신은 안녕이라 말한다

 

 


 

안태운 시인

1986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 졸업. 201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2016년 시집으로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산책하는 사람에게』가 있음. 2016년 제3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