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환 시인 / 바위의 잠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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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 시인 / 바위의 잠
누가 산을 지키고 가꾸는지 태풍 폭우로 외딴 산장 무너지고 산지기도 하산한 초가을 산중 산사태로 몰골을 반쯤 드러낸 채 산비탈에 박힌 바위 보면 알겠다 이목구비 다 뭉개진 신원미상의 미라 소나무 뿌리 탯줄인 양 품고 있다 온전히 숨어 사는 게 완전범죄만큼이나 어렵다고 구름 그림자 끌어다 덮는다 다 닳은 그 무릎 아래 굼벵이 적 깃들어 살던 매미 떼, 여름 내내 땅 속 비밀을 다 풀어 놓고 어디로 갔을까 출렁이는 참나무 목마 태운 채 여기가 숲의 배꼽 우주의 중심이라고 엎드리는 바위 두드리면 북소리 들릴 듯 깊은 잠 깰세라 다람쥐가 햇살 몇 알 물어다 곁에 묻어 두고 급히 꼬리를 감춘다
-시집 『어둠의 얼굴』 (푸른사상, 2011)
김석환 시인 / 立春大吉
1. 내가 '나/너' 자를 겨우 구별할 줄 알던 어린 시절 산안개 자욱한 뒷산 너머로 풀 베러 간 아버지가 바위굴에서 잠시 외출한 엄마를 기다리던 너구리 새끼 댓 마리를 생포해 왔지요. 횡재를 했다는 듯 잘 길러 종자를 번식해 볼 요량으로 빈 돼지우리에 녀석들을 넣어 가두고 짚을 깔아주고 미음을 끓여 주었지요 이튿날 새벽 궁금하여 돼지 우리를 들여다보니 어느새 엄마 너구리가 잡혀 간 새끼들 체취를 따라 뒤를 밟아 와서는 녀석들에게 태연히 젖을 먹이고 있었지요 아버지는 너구리 가족들을 다시 칡덤불에 덮인 제 보금자리로 데려다 주었지요
2. 불암산을 넘어 열병합발전소 굴뚝 연기를 헤치고 24시편의점 옥상을 지나 쌍용세탁소 간판을 스치고 아파트 베란다 성긴 발 틈새로 찾아드는 아침 해 발자국 소리
어머니 산소 곁에서 캐 온 春蘭, 떨리는 마른 꽃대 끝에 너구리새끼들 눈동자처럼 깜박거리는 꽃눈 다공질 蘭盆石을 적시는 성급한 햇살한줌
-우이시, 2004년 3월호
김석환 시인 / 밥이 法이다
달이 뜨지 않는 달동네 창문마다 3등성 등불이 곱네 발목 저린 가로수 서둘러 어둠 속으로 숨네
하루치의 영수증과 거슬러 받은 동전 몇 닢 딸랑거리는 안주머니, 늘 허기진 짐승이 되어, 밥 앞에 머리를 숙이네
우주의 중심은 어디? 식탁 한가운데 오른 밥 천수답에 잠긴 하늘에서 건져 올린 달
어머니 물 항아리에서 건진 별 거울보다 더 환하게, 아프게 눈을 찌르는 무색무취의 빛
고가도로를 과속으로 달려와, 밥 앞에 무릎을 꿇네 뜨겁게 서려오는 하얀 김 얼굴 붉어지네
밥이 무거운 法이네
김석환 시인 / 不在- 간장종지
아침 식탁으로부터 간장 종지를 떨어뜨려 깨뜨린 것은 아희야, 네 실수가 아니란다 더구나 점심때가 되면 들 세끼 식탁 변두리 아니 중심에 놓여 있던 간장 종지 무늬와 모양은 커녕 그 있던 자리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태연히 식사를 하는 것은 우리 실수가 아니란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가 어느 날 자리를 비우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게, 얼마 후 누군가 왕성하던 우리 식욕이나 얼굴을 기억해 주지 않는 게 실수가 아니듯 아희야, 식탁 아래 또는 우리 등뒤에 도사리고 있는 저 거대한 힘을 봐라 누가 누구를 탓하겠느냐
김석환 시인 / 남도기행5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이라던 영랑 생가 사랑채 처마 밑 두루마리 짚멍석 그 결승문자처럼
중수중인 孤山 종택 뒤란 붉은 동백꽃, 지고 난 빈 자리처럼
대흥사 근처 遊仙山莊 장독 속 곰삭은 깻잎장아찌, 총총한 엽맥 그 갑골문처럼
김석환 시인 / 활골에 가서
#1 어머니 베적삼 빛 눈발 날리고, 우연히 새로 열린 林間道路를 따라 靑山 쪽으로 차를 몰다가 활골, 동네 어귀 立石에 흐릿한 글자를 읽다 짐짓, 자석에 끌리듯 기억의 미로로 들 어서네
#2 할머니, 혹시 淸州 韓氏들이 살고 있나요 죄다 떠나가구....... 죽구... 여남은 집 눌러 살지유 뒤란에 우물 깊은 서당집이 있나요 우물은 발써 없어졌는디.......저 개와집을 서당집이라 허지유 아이들 잡아가는 물귀신 산다는 연못이 어디 있나요 저 등 너미 있는디 시방은 얼음이 꽝꽝 얼었지유
#3 낯선 할머니가 건네는 한 대접 물 밑바닥에 내 어린 날 어머니 손잡고 단 한 번 다녀 간 일찍 代가 끊긴 서당집, 은행나무 드러난 뿌리에 앉아 올려다보면 활골宅, 내 어머니 하늘天 따地...3,4조 音步로 이제 막 산마루 넘어 내려오네
김석환 시인 / 실소(失笑)
흙먼지 푸석거리는 가문 날 양수리 산골 열 평 밭을 빌어 몇 차례 씨앗을 다시 뿌리다 내가 웃고 첫 수확을 하여 나눠주니 웃기게 생겼다 이웃들이 웃고 타이어 값이나 빼겠느냐 아내가 웃고 가계에 보탬이 되겠느냐 딸애가 웃고 시 창작 야외수업을 간 대학원생들 밭가에서 사진을 찍다 웃고 오이꽃 고추꽃 가지꽃 감자꽃은 지난밤에 개똥벌레 달빛 이슬 내리더라 하얗게 웃고 상치 쑥갓 열무 시금치는 뿌리 밑에 벌레들이 간지럽힌다 파랗게 웃고 개구리들이 숨어 시를 읊다가 웃고 구름이 흘러가다가 웃고
김석환 시인 / 칭다오 여담 21 ㆍ윤동주 시인 생가에서
시인은 살아서 부끄럽고 죽어서는 춥다 광개토대왕의 호령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기침 소리도 윤동주 시인의 무덤도 눈에 덮여 잠이 깊은 북간도 용정시 명동촌엔 농가 스무여 호 남쪽으로 엎드려 연기를 피웠다 옛 교회당은 외양간으로 되고 높다란 장대 끝에 하얀 십자가 후쿠오카 감방 안보다 더 차가운 영하 20도 삭풍에 흔들렸다 미국의 겨울 햇살만 부재중인 주인을 찾느라 안방을 기웃대고 있었다 지름길을 두고 뱃길 수만 리 에돌아온 일행은 마당에서 하 하 하, 기념사진만 찍었다 시인의 무덤엔 눈길이 험하여 올라가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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