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야 시인 / 봄여름가을겨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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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 시인 / 봄여름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 다시 겨울 겨울은 손목이 가는 눈발
지난겨울은 잘 있습니다 그때 내린 눈은 아직 다 녹지 못한 채 올해는 올해의 눈이 내립니다
우리는 흩뿌려진 눈처럼 몇년째 만나지 못했습니다 역병은 거리의 불빛을 모두 잠재우고 햇빛도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눈송이들은 눈송이들과 함께 흩어지면서 하염없이 내립니다 내리는 눈이 하나로 뭉쳐진다면 땅은 커다란 눈사람과 하늘은 거대한 빙하 나는 보이지 않는 눈송이
밤 속에서 밤이 밤을 다시 열리고 갑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겨울 겨울은 봄을 만듭니다 봄은 나비를 만들고 나비는 숲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일년 내내 슬픔은 슬픔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의 마음을 다 쓰겠습니다
이설야 시인 / 그림자극
공장에서 돌아온 동생 퉁퉁 부은 손을 보여주었다 쫒아오던 그림자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밤마다 축축한 벽지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나는 동생의 그림자를 껴입고 잠 속을 들락거렸다 그림자 속에는 동생의 인형들이 살고 있었다 일곱개의 밤을 하늘에 펼쳐놓고 박음질하느라 밤에도 인형들은 눈을 감지 못했다
꿰매고 꿰매도 실밥이 터져나오던 동생의 어린 노동으로 밑단이 뜯어진 가계를 조금은 꿰맬 수 있었다 얼굴까지 퉁퉁 부은 월급날 동생의 축 늘어진 그림자를 인형들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동생의 그림자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인형들은 울고 웃다가 낡은 찬창 속으로 들어가 달그락거렸다 동생의 일곱 그림자가 빈 그릇 속으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설야 시인 / 벽 속의 또다른 벽돌*
우리는 벽을 조금씩 밀었다
한 손에는 꽃을 들고 한 손에는 죽은 물고기를 들고
반대편에서 던진 벽돌로 벽은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각자 던진 벽돌을 세면서
어차피, 벽엔 또다른 벽돌이 쌓이겠지 어차피 넌 벽 속의 또다른 벽돌일 뿐이야
한 발과 또다른 한 발이, 벽 아래 그어진 금을 넘는다
그것은 벽 속에 낀 그림자를 꺼내는 일 우리가 우리를 넘는 일
조금씩 허물어지던 벽이 등을 돌려, 우리는 각자의 얼굴을 깨기 시작한다
*핑크 플로이드 Another Brick is the walle」중에서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에서
이설야 시인 / 설탕과 계절노동자
1. 초대받은 곳에는 가지 않았다 가기 싫었다 내가 나를 한 번도 초대하지 않은 방에 아침 달이 찾아왔으므로
내가 나를 다 허락할 때까지 가지 말 것 내게 달콤한 것이 당신에겐 독이라는 것 강요하지 말 것
곧 부러질 높은 나뭇가지를 잡기 위해 전 생애를 쏟아붓는 무모한 나날들, 반대편에 서기로 한 날은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2. 우리는 누대로 이민자들, 난민들 계절노동자들이 세상 곳곳에 눈물로 배달했던 설탕은 달콤하게 녹아내리는데
궤도를 잃고 헤매고 또 헤매는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우리는 재 묻은 얼굴을 서로 닦아주었다 굴뚝에 갇혀 글뤽아우프! 글뤽아우프! 안부를 묻는다
3. 계절과 설탕을 교환하는 아침 식탁은 빙하처럼 흘러내리는데
측량할 수 없는 검은 시간이 파이프를 타고 지나간다 물과 전기 그리고 분뇨 발밑까지 부끄러워진, 나는
무언가를 자꾸만 잃어버렸다 몸에서는 극지의 말들이 쏟아졌다
결국 초대받은 곳에는, 어제 본 바다를 대신 보냈다
이설야 시인 / 문 닫은 상점의 우울
나는 집 나간 고양이 문 닫은 상점의 우울을 즐기는 나는 뚱뚱한 개 새끼 아무거나 처먹고 검게 탄 인형을 토하는
내가 낳은 그림자를 뭉개며 막차를 쫓는 나는 깜깜한 아버지의 온도 가질 수 없는 사랑만 골라 하지
나는 네 발로 뒤로 걷는 수수께끼 두 발로 거짓말을 즐기는 맑은 날은 깨금발로 금을 밟아 두꺼운 질서를 비웃곤 하지
나는 아무것도 포개고 싶지 않은 낮달 오래된 시계가 버린 그늘 잠자리 눈으로 뒤통수만 바라보는 새끼 고양이들을 자꾸만 죽이는
이설야 시인 / 점포정리
구십 퍼센트 할인 의류 매장 앞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토착민에게 일손에게 기계에 끼인 사람에게 얼마나 주었을까
벽에 박힌 못에 햇볕에 바짝 말라버린 장롱에 눕지 못하는 그늘에 매일매일 넘치는 물건들을 사서 걸어놓는다
남아도는 것들 풀지도 못한 상자들 창고들이, 집들이 작고 작아진다 빌딩과 거리들 비좁아 바람이 자주 갇히고
벽보와 현수막 위에 흩날리는 상표들 내일을 담보로 긁힌 카드들 많이 사거나 많이 망하거나
계산을 마친 손들은 점점 말라간다
하청과 매장 사이 적자와 생존 사이 오늘도 점포는 정리되고 살아남은 겨울은 이월되고 간판은 어디서나 뜯겨져 나가고
이설야 시인 / 앵무새를 잃어버린 아이
아이야. 너에게서 새를 꺼내줄게 너의 입에 갇힌 새를 꺼내줄게
마카우 앵무새를 기르는 집이었지 조흐라 샤는 가사도우미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을 했지
새장 속 값 비싼 네 마리의 앵무새 그중에 한 마리가 날아간 건 실수였지 잠시 새장을 열고 먹이를 주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사라진 새 사라진 세계
파키스탄 소녀 조흐라 샤는 겨우 여덟 살 조그만 손으로 아기 기저귀를 갈고 마당을 빗질했지 몇 푼짜리 동전으로는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마카우 앵무새를 놓쳤다네 구름처럼 흩어진 새의 발자국 어디로 날아갔을까
주인에게 맞다가 뼈가 으깨어졌지 소녀는 새를 삼킨 하늘로 날아갔다네 날개를 펴서 구름다리 위로 커다란 새장 밖으로 날아갔다네 소녀가 살던 작은 마을에는 흰 깃털이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었지
새는 천사의 호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나 새를 찾아 천국으로 간 아이
하지만 천국엔 새가 없지 죽은 새만 있지 신을 찾다가 눈이 먼 죽은 새들 오직 죽어서 가는 새들만 있지
아이야. 새에게서 너를 꺼내줄게 새의 입에 갇힌 너를 꺼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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