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시인 / 수월관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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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시인 / 수월관음
천 개의 달이 뜬 밤이었지 구름이 피어나면 달도 주춤하고 비켜나면 다시 천개의 달이 떠올랐어활짝 열린 대문 밖 함지박마다 그득한 오곡밥 묵나물 복쌈 쥐불 놀던 삽상한 발자국들 떠난 자리 함지박은 비로소 달을 품을 수 있었지 말간 정화수그릇에 가득 차오른 보름달은 일찍 시집 간 언니 얼굴만큼 고와서 손을 모으면 물그릇이 출렁, 울었던가 미제깡통 뚫린 구멍 사이로 쏟아지는 별 별 별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길다랗게 궤적을 그으며 떨어지는 나의 별은 *알데바란 Aldebalan 별똥을 주우면 잠은 달아나고 별똥을 먹으면 눈썹은 하얘지고 동생은 어려서 별 따라가고 엄마는 머리 희어 별 주우러 가고 달 맞으러 가는 길 어디만큼 갔니 당당 멀었다 나는 별 찾으러 갈거야 땅콩 호두는 부스럼 가져가고 입술만 축여주던 찬술은 귀를 뜨이게 하고 백구랑 먹던 절구통 찰 비빔밥은 몸에 윤기를 준다지 더위 팔이 하던 까까머리 아이들 실패 떠난 연이 날던 하늘 그 하늘과 땅이 시이소 탔던 널뛰기 둥글게 손잡고 돌았던 강강수월래 장구 치고 상고 돌리며 밟았던 창수네 경범이네 준식아재네 근배네 다 어디갔을까 물그릇에 앉은 관음이 자꾸만 부풀어 호두껍데기 부수듯 아작 한 귀퉁이 깨물면 떫은 한 입 꺼지고 자꾸만 꺼지고 밤마다 꿈을 재우지만 머리카락은 시절 없이 하얘져가 엄마처럼 희미해져가 달 빛 마알가니 고운 보름날 밤 정화수 물빛에 가부좌 틀고 앉은 수월관음 불꽃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
* 경범ㅡ해창 스님의 속명, 근배ㅡ담준 스님의 속명, 창수ㅡ상진 스님의 속명, 준식ㅡ법공 스님의 속명.
김현주 시인 / 각개전투
인큐베이터 안에서 숨쉬는 애호박, 작은 상자 안에서 자라는 송아지, 도살장으로 가는 황소의 쓸쓸한 눈, 칸막이 안에서 혼술하는 고시생, 빗방울 하나 없는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짓는 노아, 불탄 노트르담 성당에서 안전모를 쓴 채 연주하는 오르가니스트, 텅 빈 성전에서 허공을 치며 설교하는 성직자, 비닐 옷을 입고 돼지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
호시탐탐 노리는 적병을 곁눈질하며 각자 벌이는 생의 전투가 치열하다
불안을 장전한 단 하나의 무기는 흠 없는 마스크,
문상객도 없이 홀로 거두는 최후의 숨을, 자루에 쓸어 담는 검은 그림자
언젠가 불태워질 낙엽, 저 외로운 전투를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데.
-시집 『유채꽃 광장의 증언』
김현주 시인 / 비대면의 저쪽
선과 악이 서로 낯을 가리듯 서로의 얼굴을 가린 대문 앞, 택배아저씨가 기척도 없이 물건을 던지고 유령처럼 사라진다
너무나 조용하여 다 읽지 못한 적막의 숨소리 휴지기에 들어간 성소는 지금 침묵을 번식 중이다
혓속에 갇힌 태초의 구음口音들 사랑이란 말들이 농밀하게 담겼을 입술을 가리고 사제들도 지저귀는 것이나 떠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책 넘기는 소리와 책상 무릎이 서로 부딪쳐 어둠의 난간을 붙들고 시간의 넓적다리가 녹는 중이다
경로를 벗어난 새들이 배회하는 봉쇄원 외로움의 극지에도 틈이 생긴 듯 사랑한다, 사랑한다, 한없이 길어지는 혀 영상 속 남자와 여자가 뜨겁게 포옹하고 있다
비대면 저쪽도 지금 고독을 탈피중인 듯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당신이겠지, 당신일 거야, 먼 데서 옮겨 심은 천리향이 홀로 흐느끼는
이곳은 밤낮 없는 고독의 서식지, 기척도 없이 누가 문밖을 왔다 떠나는지 발버둥치는 번개와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김현주 시인 / 목줄
참, 중요해요. 생김새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아요
목매인 흔적이 없으면 다 사생아 적막이 이끄는 길을 내가 모르니 짧은 다리엔 탄력이 붙어야해요 내 조상은 알지 못하던 신생아파트산책길 봄부터 비비새는 그렇게 울면서 뛰어오더니 비린 바다 냄새에 낑낑거리던 유년은 성큼 자라서 꼬리 흔드는 기분을 계속 하울링해요 멀어질 때마다 주저 없이 잡아당기는 금빛 목줄에 안도해요. 족보 없는 이웃끼리 우연히 마주치면 킁킁 내부에서 꺼진 야생의 불꽃이 흐느껴요. 흥분도가 높아진 집시의 연애는 거듭 실패하고 돈키호테를 닮은 다섯 뿔 달린 짐승과 이별한 뒤 밤거리에서 새 주인을 만났지요.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것 긴긴 방황에서 돌아와 사타구니를 파고 있는 누이여, 저는 다리로 떠돌던 광야를 그리워하는 일은 전혀 없겠구나,
꼭 기억해요. 토토* 외출할 때 리드줄의 최대치는 2m 이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의 예의라는 것을.
*토토는 유기견
김현주 시인 / 달리는 개의 기분
뺑소니치는 저 은빛 승용차를 쫓아 발바닥에 불이 붙도록 달리던 개
뚝, 멈추고 멀어지는 차를 망연히 바라본다
버려지던 순간에도 웃어주던 슬픔 같은 까만 눈동자를 그대는 기억하는가!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던 맹목의 날들을 거세당한 야성을, 자조 섞인 울음을
뒷다리 번쩍 쳐들고 탈탈 털어버리는 가변차선에 고인 핏물인 듯
반인반견反人反犬의 슬픈 짐승들이 죽을힘을 다해 컹컹, 울부짖는 배신의 저물녘.
김현주 시인 / 살다 보면
지독한 가뭄 끝에 비가 내립니다 더 높고 낮음에 걸림 없이 쏟아지니 순식간 늪에 수초가 환하게 번집니다
넉넉한 강물이 넓은 강심江心드러내고 밝아진 노랑어리연 화원을 만듭니다 풍경의 싱그러움이 지독하게 끌립니다
목마른 일상의 갈증을 풀어주며 희망이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퍽퍽한 하루의 골에 스며드는 빗줄기
-《성파시조문학》2023. 창간호
김현주 시인 / 없는, 연애에 대한 것
도련님! 달이 차올라 만삭이 되었네요 진통이 느껴져요, 꽃나무 아래로 갈까요 쿵더쿵 요동치는 가슴 안고 냇가로 갈까요
쏟아내는 빛들을 고스란히 품에 안고 다음날 그 다음날도 오실 날만 기다려요 한바탕, 꽃이 지기 전에 당도 하셔야 해요
-《한국동서문학》 201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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