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현주 시인 / 그러니까, 살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 08:00
오현주 시인 / 그러니까, 살아

오현주 시인 / 그러니까, 살아

 

뼛골짝마다 고인 눈물을

아시아 여성의 손을 빌어 짜낸다

제 스스로 우는 법을 잊어버린 나는

숨 쉴 기력마저 바닥으로 떨어지면

어눌한 한국말로 아픔을 물어보는 이

여성에게 간다

아니예요 거짓말을 하자 다 안다는 듯이

나의 등에 손을 지긋하게 올리고는

잠시 머무른다

그녀의 손길은 할머니의 할머니의 숨결처럼 따스하게

내 몸 안 시원(始原)에 와 닿는다

살비듬이 떨어지는 손끝

물기를 잃어버린 머릿구멍

햇볕에 빨래처럼 몸을 내다 널 듯

그녀에게 안긴다

나도 아시아 여성이고

당신도 아시아 여성인데,

우리 사이는 태평양처럼 멀다

웃음인 듯 몸울음이 새어나오면

사지를 비틀어 끝까지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탈곡한다 아니 탈골인가

당신은 오래오래 딱딱했었어요

이 말이 귓속에 맴돌고

허리를 수그리자

머리 속 돌멩이가 진자운동을 그린다

반복되는 하루만큼 힘든 건 없지 않나요?

나의 물음에 파열음을 내며 미소 짓고 없던 사람처럼

사라진다.

-계간 <사이펀> 2024 겨울

 

 


 

 

오현주 시인 / 마두금

 

 

말 달린다, 용맹한 칸의 후예

어깨 위에 매 한 마리 올리고

참으로 말 달린다

 

고독하여 시야가 넓고 또렷한 사내가

길들인 유일한 그 새

제 주인 생애와 영락없다

날렵한 발톱과 부리에 점철된 맹금의 고독이라니

 

몽골 사내는 평생 말과 함께 희노애락한다

짝의 눈, 눈빛

몸소 익히 알고 있으므로

충분히 고독하여

 

강인한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나온 발자국 지우는 모랫바람 뒷덜미에서

부풀어 터지는 살 울음 소리

어르듯 끊어내듯

 

알타이어 산맥 겉으로 누운 초원에서

바위무덤처럼

조그맣게 마주앉아 오장육부

어르듯 끊어내듯

연주하는 너의 아리랑

너와 나의 몽고반점

 

쓸개의 하소연이야, 말없이 말도 없이

가죽 머리와 꼬리뼈만 남은

저 말울음 소리라니

 

-시와글벗문학회 동인지 제9집 《어느 날엔가 바람에 닿아》중에서.

 

 


 

 

오현주 시인 / 일용직 막노동

 

 

오늘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한다

높다란 하늘에는

시리도록 퍼런 바람이 불고 있다

 

하루치 밥값 벌기 위해

오로지 하나밖에 남지 아니한

젖은 신발 신고

내것도 아닌 벽돌을 젊어져야 한다

 

이름도 없이 "어이, 노형"

돌먼지 뒤집어쓴 채

뒤돌아보아야 한다

 

먼지 묻은 수건

먹구멍에 두르고

구슬땀 닦으며

눈물도 몰래 훔쳐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가 알겠는가.

불빛 허름한 뒷골목에서

하루치 밥값 움켜쥐고

소주잔 기울이는

그 사내

검게 그을린 어깨에 박힌

철근 같은 삶을.

 

- 시와글벗문학회 동인지 제5집 《詩人의 향기》중에서.

 

 


 

 

오현주 시인 / 벌써

 

 

무채색의 외도, 젊은 남자가 얼룩을 내지르고 있다

흰 꽃잎 검버섯 피어오르듯이

 

(그가 편의점 계단의 햇살에 눌려 잠든 낮을 보았다)

 

생기로운 스펙트럼 어쩌지 못해

앙다문 그늘 끌어안고

지저분하게 시든 목련 같은 남자

 

너무 아픈 사람은 잠 속에서만 살아야 하듯이

두드려 깨울 수 없는 잠이 깊다

 

빛 반대쪽으로 갈 데까지 가 본 남자

술병으로 뼈대 끼우고 일어선 봄밤이라서

후드득 엉망을 튕겨내고 있어서

반듯이 반드시 고쳐 말할 수 없어서

이 시절을 받아적는다

 

(이제 나와 당신은 희고 깨끗해질 수 없다)

 

지나간 생애를 지울 수 없듯이

순백으로부터 옮은 허언이듯이

 

낙락한 봄밤을 촉진하는 잎사귀가 올 것이다

나뭇가지는 해진 그림자를 탈의할 것이다

 

서둘러 목련이 지고 있다

 

 


 

 

오현주 시인 / 건반에서 건반으로

 

 

울려주기를 원하는 팽팽한 줄이라고 했다

두드리면 깨어나는 문 너머를 몽상이라 말한다면

조율한 문과 줄 사이에서 달콤한 단조가 태어났다

 

몸을 가꾸어 음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동안

 

팔 하나 빼고 발 하나 빼면서 알았다

악보에 없는 아니, 있는

빈자리를 채운 수많은 암시

이 기쁨과 슬픔의 복화술

 

계절과 계절을 건너는 영혼을 환절이라고 했다

 

변주하는 악장에서

여백이 된 그 많은 알몸을 말한다면

줄 당기는 너는 안으로 안으로 있었으나

 

계단과 계단 틈으로 겹겹이 울었다

 

가을이 겨울로 옮겨갈 시기라고 했다

울음은 색채를 덜어내고 선명한 입체가 되었다

 

후미진 사각지대에 알 낳는 여자를 보았다

검은 무릎 사이, 흰 새처럼 외발로 서 있었으나

부화한 자식들은 하나같이 음표와 섞여들었다

 

기막히게 기쁘게 슬프게 울려줄게, 여자!

너의 속살을 만진 뒤 함부로 지나치지 않을게

오르거나 내려오는, 그

경계에서 관계에서

 

 


 

 

오현주 시인 / 빗물

 

 

우산은 접는다

 

너라면

아문 정수리를 적시고

내 깊은 기슭까지

흘러들어도 좋다

 

달이 뜨는 밤에도

뙤약볕에 타들어가던

이 목마름을 알까

 

흥건히 쓰고 또 썼던 검은 글씨

투명하게 헹구고

 

끝내 말 못하고

이대로 뭉개진 얼룩

흘려보내도 좋다

 

 


 

 

오현주 시인 / 비ㆍ9

 - 우산을 펼치며

 

 

그 후로 비 그친 날들

사선으로 봉인되어 말라 죽어가는

볕을 탕진한 시간

 

주검 맴도는 독수리 부리처럼 솟아오른

"?"

 

'강이나 바다로 돌려보내 줄래?'

 

결박당한 목줄 풀어내야지

움츠린 관절 벌어지는 - 통증이 지나고

촤르르 펼쳐지는 물갈퀴 - 빗물이 지나고

 

손바닥 높이 들어 찬양하리라

살아있음에 고통 받는 노예의 자유

 

비 내리는 거리

정수리 점령당한 낯선 사람들

물음표 움켜쥐고 하나둘 지나고

 

물갈퀴가 돋아나고 있는

그들의 아가미.

 

 


 

오현주 시인

월간문학공간 시부분 등단. 칼럼리스트. 시와글벗문학회 동인. 선진문학작가협회 회원. 선진문학(선진문협)소록도 시화전 출품. 전남방송 문화사회부 3부장. 전남방송 칼럼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