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영옥 시인 / 그 하루, 아주 달았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1. 08:00
한영옥 시인 / 그 하루, 아주 달았네

한영옥 시인 / 그 하루, 아주 달았네

 

 

그 여자에게

한창 물오른 애인이 보내준

복숭아 수북수북 담긴 소쿠리가

복숭아가 뭔지도 모르는 마을에 쏟아졌네

사랑은 꼭꼭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여자 이 집 저 집 나풀거리며

복숭아 몇 알씩 골고루 나눠 돌렸네

온 이웃이 복숭아 단물에 흠씬 젖어

그날 하루 여자와 함께 아주 달았네

그 여자 나풀거리면서 찬사 받으면서

내년 이맘 때를 성큼 기약하였나보네

내년 이맘 때, 성큼 오지 않을 이맘 때에

그 여자는 빈 소쿠리를 옆에 끼고서

들썩거리며 한없이 흐느껴 울게 된다네

그래서 수상하게 그 하루 달았던 것이네

복숭아가 뭔지도 몰랐었는데.

 

 


 

 

한영옥 시인 / 규정

 

 

꼭 당신이어야 할 까닭이 없이

지금 내게는 당신이지

나는 마침내 나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렇듯 내게는 나이듯

이제 당신을 잡아두지 않으면

당신은 흩어져 버릴 거야

마음이 튀어올라 떠돌아다니다

하얗게 질리며 떨어진 꽃잎 자리에서

애써 생각을 늘이고 있었지

떨어져 쌓인 이 마음 부스러기가

들러리 섰던 진짜 마음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제 더는 생각을 늘이지못해

얇아진 생각은 끊어지고

얇아지며 당신도 끊어질 테니까

그래서 꼭 당신일 까닭이 없이 당신이지

하얗게 꽃진 자리 쳐다보며 당신을 묶고 있어

떨면서 떨면서 꽁꽁 묶고 있어

 

 


 

 

한영옥 시인 /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

오래전에 아주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산성 길 걷다가 마주친 열나흘 좋은 달

자꾸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거듭 생각되며 나는 또 부푸는 것이었으니

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 주시는 그 손길은

나를 얕잡아 헛생각 또 넣어주시는 것이리

 

얕잡아 보는 눈길, 한두 번 받은 것 아니니

울먹이다 그치고 하늘 한 번 우러르면 되지만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 리 밤길을 어이 갈까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탱탱했으면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한영옥 시인 / 당김

 

다시 너는 청주로 내려가고 있다

네가 자리잡았을 고속버스 의자의 위치가 뵈고

안전벨트 잠그는 소리가 툭, 귓전에 떨어진다

서울을 한참 벗어나 가물가물 졸음에 겨워하는

너의 눈언저리 따라 나도 가물가물 끄덕대는 중

옆에 있을 때나 청주에 있을 때나 네 작은 양 손

나를 잡아당기며 힘내라, 힘내라 힘줄이 불거진다

핏줄이 당긴다는 것은 훌쩍이며 연민이 온다는 것

너는 내가 측은하고 나는 또 네가 측은하기만 해서

간지러운 말들만 골라 간지럼 많이 태웠던 거야

핏줄이 당긴다는 것은 무조건 막아주고픈 간절(懇切)

이제 집으로 들어갔느냐, 집안부터 잘 살펴보고

몸 편안히 다독인 뒤에 무사 귀가 알려다오.

 

 


 

 

한영옥 시인 / 그리운 것이 뭐냐고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네

밭일하며 흥얼거리는

아주머니들 곁에서

님 그리운 것이 뭐냐고

졸라댔었는데

그리운 것

둘둘 말아간 먼산

산벚꽃 불긋불긋 덮고

저 혼자 호사하길래

부러운 듯 쳐다보긴 하는데

그리운 것이 뭐냐고

졸라대진 않는다

저녁 이젠 없으니.

 

 


 

 

한영옥 시인 / 동안에

 

네 얼굴의 먹구름 흘러가기를

순하게 기다리는 동안에

네 얼굴이 말갛게 드러나기를

천천히 기다리는 동안에

많은 것이 지나갔을 것이다

때를 놓친 것은 아니다

지나갈 것들 지나갔을 뿐이다

잡아뒀으면 까마중 열매라도 됐을까

네 참얼굴을 기다리는 동안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한영옥 시인 / 아니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서로에게 좋은 마음결 두고

사심 없는 눈길 나누면서 마주치던 사이였다

어느 날 차나 한 잔 나누자면서 걸어가던 때

그에게 머리를 푹 묻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외로움이 과하게 부푼 탓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허공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순간의 절제를 오래 쓰다듬어주곤 했었다

그냥 그만한 정도의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안 보아도 괜찮고 보면 많이 반갑고 그랬다

오랜 일터에서 돌아온 후 연락이 점차 끊겼는데

그가 육신을 벗고 허공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한 예의처럼 진한 눈물 두 줄이 내렸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어서

맑은 눈물 두 줄이 천천히 내렸다.

 

 


 

한영옥 시인

1950년 서울에서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적극적 마술의 노래』 『처음을 위한 춤』 『안개편지』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다시 하얗게』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사랑에 관한, 짧은』 등. 1997년 한국예술비평가상, 2000년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현재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