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진 시인 / 어둠에 관한 상념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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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시인 / 어둠에 관한 상념
어둠이라는 말은 캄캄하다는 말도 잠재운다는 말도 아니다 어둠은 태양을 배제하지 않으며 닭을 구속하지도 별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어둠은 누룩과 같이 술과 같이 서로를 익히고 있을 뿐 국화의 만개를 위해 어둠이 필요악이라는 가설은 철저히 무시되어야만 한다 어둠은 철저히 어두울 때 빛날 뿐 어둠은 결코 폭력이나 죽음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어둠은 마음을 훔치는 도둑이 아니다 이별이나 곤궁에 대하여 어둠을 웃거름하지 말자 어둠의 나직이 외치는 저 지하의 소리에 대하여 급박하게 접근한다 어둠은 강도야 불이야 그런 다급한 소리에 소경이다 숨죽이며 담을 넘는 한 가장의 발자국소리를 증명하기 위해 어둠은 눈을 부릅뜨는 것이다
김순진 시인 / 깻잎반찬
깻잎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실에 꿴 깻잎 뭉치처럼 뭉쳐 살고 싶다 서로 떨어져 국수 수제비를 먹고 살다가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따끈한 쌀밥 한 술 산다고 우기며 깻잎을 얹어 주고 싶은 사람 아래 있는 깻잎 꼭지를 젓가락으로 잡아주고 싶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깻잎 장아찌가 서로 붙어 잘 일어나지 않을 때 밑장을 지그시 눌러 주거나 먹고 사는 일을 거들어 주고 싶은 사람과 이웃하며 살고 싶다
김순진 시인 / 싸래기눈 온 아침
어제 저녁 외양으로 소 들여 맬 때
이눔의 소 걸어가며 와달달 오줌 싸더니
쇠오줌 언 마당 위 싸래기눈 이뿌게도 뿌렸네
보리밥 먹기 싫은데 퍼다 쌀뒤주에 담아 둘까
감자 먹기 싫은데 백설기로 시루에 담아 찔까
아니야, 아버지 밥 잡숫고 나무 가셔야 하니 사기사발 쌀밥 한 사발 퍼드려야지
김순진 시인 / 아침 냄새
벌써 아버지 기침하셨나 보다 아궁이 짚불 때는 냄새가 난다
새벽안개의 습한 냄새가 식전 까치만큼 반갑다
등겨 한 바가지 넣어 여물을 저으시나 보다 짚풀콩깍지 끓는 냄새가 난다
함지박에 여물 퍼 외양으로 가시나 보다 봉초 말아 피우시는 신문지 탄내가 난다
부림소 침 흘리며 여물을 먹나 보다 엉덩이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쇠똥 냄새가 난다
어머니 조반을 준비하시나 보다 화롯불 위 토장 끓는 냄새가 난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나 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김순진 시인 / 국수나 한 그릇 하러가세
여보게 날이 많이 추우이 저 시장통 노점 뚱땡이 아줌마네 뜨겁고 얼큰한 잔치국수나 한 그릇 하러가세 고추장 한 숟갈 푹 퍼 넣어 머리가 쭈뼛쭈뼛 가렵도록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간간히 씹히는 깨소금 맛! 비빕 국숫발 쭈르륵 빨다 입언저리 빨갛게 묻어나도 언 몸 이마에 땀나게 비빔국수나 얼큰히 비벼보세.
여보게 날이 많이 더우이 저 시장통 노점 뚱땡이 아줌마네 얼음 버석한 냉국수나 한 그릇 하러가세 오늘은 울화가 치미는 날 불어 터진 국수 같은 인생살이 콩국수 맛처럼 시원하고 고소한 그날이 있을 걸세 콩국물 후르륵 소리 내며 마신다 흉 좀 보더라도 등골이 오싹 땀 싹 가시게 콩국수로 속이나 달래보세
김순진 시인 / 종이꽃
인사동에서 酒類 시인 셋 非酒類 시인 하나, 그렇게 시인 넷이 누구 시가 좋으니 나쁘니 자연발생설이니 창조론이니 詩안주를 놓고 論爭하며 술을 마신다 누가 술값을 낼 똥 생각지 않고 안주를 하나 더 시켰더니 서비스 안주라며 도토리묵이 나왔다 그에 소주 두어 병 더 마시며 미련한 놈들아 나쁜 놈들아 술 배울 때부터 두꺼비만 마셨는데 일본으로 팔아넘겼느냐며 도가 지나쳐 순배 더 돌며 술이 술을 마시고
술 마시지 않는 시인은 탁자 밑에서 냉장고에서 습기 차 잘 떼어진 ‘처녀처럼’ 소주병 상표로 꽃을 접고 젓가락 포장 종이로 꽃대를 말아 종이꽃을 내밀었다. 그래, 일본을 욕해도 시가 되고 시인인 척하는 시인을 욕해도 시가 되지만 술 마시지 않고 몇 시간째 詩中드니 이토록 아름다운 詩꽃으로도 피는구나. 그날 술값을 더치페이하며 나오던 우리 입가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詩꽃이 피고 있었다
시는 술이지만 술처럼 취하기 힘들고 시는 안주지만 젓가락으로 맘대로 집을 수 없고 시는 젓가락처럼 꼿꼿하지만 도토리묵처럼 말랑하기도 하고 시는 젓가락껍질처럼 버려두지만 버려둔 시가 자라 꽃을 피우기도 하지
김순진 시인 / 버려진 밥상을 리폼하다
이사 가는 집 벽 한켠에 밥상 하나 버려져 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고 다리가 삐걱거리는 밥상 한 식구의 생사가 저곳에서 해결되었으리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엄마는 고작 계란프라이를 지져내면 아이들은 최고의 만찬을 대했으리 뚝뚝 흘리는 자장면 면발과 밥풀들을 받아내면서 맨날 김치뿐이란 투정이 아이를 위로 위로 밀어올렸으리 때로는 실직한 가장이 비통한 술잔을 기울이면 아내는 옆에서 말없이 바라보았으리 생일 케이크가 수도 없이 올라가고 축가를 부르며 박수를 치는 고사리손에 축복이 내렸으리 문득 그 가계의 숟가락소리 부딪는 소리가 들려온다 긴 장대를 일사불란하게 두들기는 한 부족의 축제가 들려온다 숲을 이루던 한 나무의 생을 외면할 수 없어 누가 볼까 슬쩍 가져다가 줄을 두르고 종이를 붙여 리폼을 한다 하여 나는 책이 된 나무와 책꽂이가 된 나무와 책상이 된 나무와 찻상이 된 나무의 저 아늑한 숲에서 오래오래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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