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시인 / 공터가 많아서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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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시인 / 공터가 많아서
내가 열지 않으면 내내 닫힌 방들처럼 아무도 여닫지 않는 녹슨 손잡이처럼 자신도 가구가 돼가는 저 늙은 여자처럼
인적이 끊긴 골목 가로등 불빛처럼 어쩌지 못해 한 곳만 응시하는 마음처럼 등 뒤에 보이지 않는 시선처럼 그 공허처럼
악수하고 돌아서는 손에 남는 외로움처럼 사람도 사람에게 한때라는 생각처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확인처럼
―시집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 2024.
김수환 시인 / 감자처럼요
감자는 숨어 있어요 왜 숨었는지 몰라요 남모르게 표정과 마음을 만들었다가 당신도 그때 세상에 나왔던 거였나요
숨어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아요 한낮에 숨었다가 쏟아지는 별들처럼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 숨은 당신처럼요
영영 숨는다는 건 영영 못 잊는다는 거 나도 숨고 싶을 때가 많아요 감자처럼요 알알이 당신 같은 감자, 영영 맺으면서요
-《좋은시조》2023. 여름호
김수환 시인 / 비단실이 술술 한정 없이 나와서
거기까지는 기맣다 없는 듯이 가맣다
가다 서고 가다 서다 어둑시근 나부룩해지던
어김질 흑공단같이 막막하던 우리는
-《시와소금》2022. 여름호
김수환 시인 / 수국
돌담 너머 수많은 다짐처럼 한 무더기 수국이 수북하게 피었다 수국 옆, 다시 수국이 불면처럼 피었다
마릴린 먼로는 마릴린 먼로로 영숙이는 영숙이로 피었다가 진다
그 옛집, 그 사람처럼 수북한 다짐이 피었다 진다
-《오늘의시조》2022. 제16호
김수환 시인 / FM91, 1MHz 뻐꾸기 소리
한겨울 적막을 쪼는 날렵한 부리 하나
명치 끝 그렁그렁 젖었다가 마르던
돌아갈 몸 이제 없는 저 푸른 목소리
-《오늘의시조》2022. 제16호
김수환 시인 / 첩첩
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 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 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 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 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 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 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 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
김수환 시인 / 그때 우리는 그랬어야 했다
이것밖에 돈벌이가 없는 사냥꾼의 갈고리처럼
그걸 받는 남극 물개의 털도 없는 머리통처럼
쿠울렁, 하얀 얼음에 쏟아지는 악다구니들처럼
-《좋은시조》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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