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시인 / 비밀을 나눈 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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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시인 / 비밀을 나눈 뒤
비밀을 나누면 믿지 못할 자가 된다
혀가 근질거려 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비밀 화농 같은 비밀 살짝 암시만 하려다 도취되어버린 비밀
귀를 막을 사이도 없이 생의 첫 숨결처럼 토해버리는 모든 비밀은 지고지순하다
눈빛, 운명, 불빛.... 목걸이, 가방, 피, 출입문.....
혁명군 같은 너의 꼬리를 누가 밟으면 너는 총구를 내게 겨눌 것이다
비밀을 나누고 싶으면 한 때 비밀이었던 것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우리는 무덤까지 같이 갈 수 있다
조은 시인 / 문고리*
삼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문 헛헛해서 권태로워서 열고 닫았던 집의 문이 벽이 꽉 다물렸다 문을 벽으로 바꿔버린 작은 존재 벽 너머의 세상을 일깨우는 존재 문고리를 고정시켰던 못을 빼내고 삭은 쇠붙이를 들여다보니 구멍이 뻥 뚫린 해골처럼 처연하다 언젠가 나도 명이 다한 문고리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나라는 문고리를 잡고 열린 세상이 얼마쯤은 된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기 전에도 누군가가 수십 년을 살았고 문을 새로 바꾸고도 수십 년을 누군가가 살았을 이 집에서 삭아버린 문고리 삭고 있는 내 몸
조은 시인 / 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비는 내리고 나무들이 낮아지는 하늘을 흔들고 있다 높은 새집이 위태롭다 빗속에서 이 하루의 남은 빛을 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어둡다 오늘도 병病 같은 우리를 덮치는 밤은 어디에서 오는지 온갖 소리들이 젖어 몸에 감기고 기둥 같은 내 슬픔도 완강하게 불어난다 어둠은 늘 내 몸에서 시작된다 내가 있는 곳은 유독 어둡고 바람은 밝은 물방울들을 훑어서 간다 어제의 그 슬픈 별도 숨은 이곳을 등지고 얼마나 멀리 나는 갈 수 있을지 빗물은 낮은 땅을 지우고 물속까지 어둠이 자꾸 모여드는데
-시집 <무덤을 맴도는 이유> 1996
조은 시인 / 봄날의 눈사람
아주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격정 하나 없는 얼굴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여자는 턱을 조금 들고 태양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우아하고 젊었다
만일 내가 아기를 품에 안았다면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아기의 미래를 바구니처럼 끌어당겨 보며 시름에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도 막막한 슬픔을 느끼곤 했으니
실미라가 없는 걱정거리를 안고 사직동 언덕길을 오르는 내 앞에서 여자는 어제도 그런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내겐 한순간도 없었더 꿈을 꾸는 여자가 봄날의 눈사람처럼 빛났다
⏤시집 『옆 발자국』, 문학과지성사, 2018
조은 시인 / 멀리서 오는 편지
일본 사는 친구는 일본에선 편지를 쓰지 않는다 그의 편지는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에서 날라온다 서울 사는 화가 친구도 로마에 가야만 편지한다 지천으로 핀 양귀비꽃이 얼마나 고혹적인지 밤비는 마음의 어느 구석을 적시는지 쓴맛을 물고 있던 예민한 혀처럼 떠나가면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잊게 되는지 어느 때 정신이 멍하도록 되살아나는지
떠난 자들은 촉촉하고 보드랍다 먼 곳에선 달처럼 둥실 떠오르는 것들이 있나 보다
조은 시인 / 쿵
빌라 앞 벤치에 누워 죽은 듯 자고 있는 남자 뜨거운 태양이 머리부터 먹어대고 있는데도 맨발을 드러내고
옆에는 낡은 트럭이 늙은 산양처럼 멈춰 있다 그걸 몰고 왔을 그는 반듯이 누웠다 고독이 그의 거친 발끝에서 응고되고 있다
코를 골지도 가슴이 부풀지도 않는 잠을 자는 그에게로 바람이 검은 비닐봉지를 끌고 와 만장처럼 흔든다
바짝 붙여 컨버터블을 주차한 여자 남자를 훑어 내린 매의 눈빛으로 경찰을 부른다 삶도 죽음도 명확히 안다는 말투와 표정으로
조은 시인 / 한 시간 지나도록
가난한 동네에서 돈을 주웠다 꼬깃꼬깃한 삶이 느껴졌다
주워도 시원찮을 사람이 잃었을 돈이었다
지갑 하나 못 가졌을 사람의 돈이었다
주운 만큼 더해 돌려주고 싶은 돈이었다
무엇에 놀라 내던지고 갔을돈이었다
그땐 중이쪽 같았을 돈이었다 차곡차곡 간추려 들고 서 있었다
문짝 없는 장롱에 기대서 있었다 골판지를 깔고 앉아 기다렸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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