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용주 시인 / 혼자 울지 마라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2. 08:00
정용주 시인 / 혼자 울지 마라

정용주 시인 / 혼자 울지 마라

 

 

하늘 아래

어떤 슬픔도

온전히 한 존재의 몫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

 

먼 단풍도

홀로 붉지 않는다

 

한 바람이

서늘한 능선의 가슴을 쓸면

마침내 모든 나무가

서로에게 물들어

 

가난한 영혼의 연대가

온 산에 붉다

 

들꽃을 바라볼 때

꽃의 귀는

너를 듣는다

 

홀로 슬퍼 자기를 연민할 때도

꽃은 피고 사랑은 간다

 

한 마음 괴롭히는

그 까닭으로

모든 영혼이 운다

 

우리는 모두 물들어 간다

혼자 울지 마라

 

 


 

 

정용주 시인 / 돌배나무

 

 

언덕에 돌배나무 한 그루 있다

외따로 있는 돌배나무는 돌담 기울어진 오막살이 한 채를 떠

올리게 한다

험산자락에 화전 터 잡은 부부

낮은 담 두르고 구들 들이고 샘물 길어 나물죽 끓이며 살아갔다

고단한 잠 위로 달빛 건너가고

계곡 밤물은 산벚꽃잎 띄워 흐른다

수수꽃 같은 아이들이 자랐다

콩 한 자루 등짐 메고 능선 넘어 장에 간

아비는 오지 않고

등잔불 그을음만 흙벽에 흔들렸다

돌담 허물어지고

빈 밭에 망초꽃 물결이 돌아왔다

빈집처럼 돌배나무는 늙어갔다

능선에 붉은 달 차오르면

주름진 나무는 제 몸에 흰 등불 걸어

달의 아이를 몸에 받는다

한 생은 꼭 살아본 것 같은

언덕 위 늙은 돌배나무

 


 

 

정용주 시인 / 서정시인

 

 

 전깃줄에 앉아 제비 부부가 토론을 하고 있다

 바짝 다가앉아서 꼬리를 까닥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제법 긴 말로 의논을 하더니 다시 한 번 빙글 날아 집을 돌아보고는 사라졌다

 제비가 떠나고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붉은 벽돌 두른 벽 틈에 시멘트를 이겨 넣고 방부 송판으로 메운 처마, 돌가루에 타르를 섞어 지붕을 씌우고, 노란 페인트를 칠해놓았다

 제비에게 금줄을 둘러놓고 들어앉은 서정시인은

 오늘도 쓴다

 왜 제비는 진화하지 못하는가

 


 

 

정용주 시인 / 반려목

 

 

하고 싶은 독백은 이것이 아니었는지

나보다 늙어버린 빈집 속에 기울어

허공이나 먼 하늘 따위 바라보지 않는

백태 낀 눈동자 눈곱 비벼내며

지나온 것이나 돌아갈 것이나

아득한 툇마루 잠깐 비껴가는 햇살

아니면 햇살이 비춘 그림자 같은 것

그을음 묻은 처마에 흙집 한 채

유유히 버려두고 종적 감춘 제비는

기억을 어디에 떠맡겨 유전하나

개 한 마리 양지에 묻고

싹틔우는 곳간 씨감자는 잊으라

어느 시간이 허문 제비집

서까래 폐기와 사이로 흰 감자꽃

한번은 피리라 삐걱이는 평상

발등에 얹은 미루나무 고목아

나 죽거든 가지에 새 앉히지 마라

죽은 나무엔 새가 없다

 

 


 

 

정용주 시인 / 집 속의 집

 

 

 전봇대에서 처마로 이어진 전화선 위에 노랑지빠귀 꼬랑지 깃털을 흔들며 지저귄다 그것이 아주 가까운 거리여서 나는 이놈이 반가워 노래 부르는 줄 알고 봄날 아침의 평화를 읊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새는 뒤쪽의 전봇대 꼭대기로 날아가 더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며 눈을 떼지 않는다 내가 돌아서자 새는 쏜살같이 집 속의 집으로 스며든다

 나는 얼마나 단단하고 나쁜 가장이란 폭력인가

 

 


 

 

정용주 시인 / 밥

 

 

뼈가 굳어 가는 병에 걸린 그녀는

무허가 지압집 3층 계단을 오르며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신발을 신고

한 칸씩 계단을 오르는 그녀는

어디 가서 밥 먹고 오라고

숟가락을 입에 대는 시늉을 했다

 

-시집 <인디언의 여자> (2007,실천문학사)

 

 


 

 

정용주 시인 / 투견 로트와일러

 

 

쇠장도리 거꾸로 박아 쇠줄 박아 쇠줄 걸었다

쇠줄에 끌려 개집 앞 부챗살로 쏠렸다

 

먼저 살던 풍산개

오줌 눈 자리마다

제 오줌을 누었다

똥 눈 자리마다

제 똥을 누었다

 

흔적들 모조리 치우고

제 흔적을 남겼다

 

밥그릇에 밥이 차자

잘린 꼬리 대신 궁둥이가

흔들렸다

 

대가리는 처박은 채

눈만 치켜떠 쳐다본다

 

*로트와일러: 투견.

 

 


 

정용주 시인

1962년 경기도 여주 출생. 2005년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인디언의 女子』 『그렇게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된다』 『쏙닥쏙닥』과  산문집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고고춤이나 춥시다』 『나는 숲속의 게으름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