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호 시인 / 피맛골 단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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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호 시인 / 피맛골 단상
저녁마다 마셨던 술 지금 어디서 익어가고 있을지 논쟁 속 숱한 이야기는 어디서 열매로 태어났을지
술상에 코 박던 시절 싫은 내색 않고 닦아내던 그 이모는 어느 세월에 입 맞추고 있을지
꾸벅꾸벅 졸던 연탄난로 어딜 가고 온풍기 바람만
오늘 난 동동주 항아리 속 초승달을 지우고 그리운 친구들 다 만나고 있다
장만호 시인 / 똘강
내 가슴속 똘강은 지금도 흐른다 혈관을 타고 이리저리 휘돌아 아버지가 오함마로 내리쳐 조각낸 바윗돌도 지나치고 놀란 고기들 달아나다 투망 속에 걸려들던 곳
고무신 신고 곡예사 되던 날 떠내려갔던 검정 고무신 한 짝 어머니께 혼줄이 났었지
구불구불 굽이돌아 버들강아지 꽃 피우고 무거운 장맛비에 검붉은 흙탕물 토해내던 곳 빠알간 나뭇잎 배 띄우고 가을 뜨거운 햇살에 춤추는 고추잠자리
겨울이면 설겅한 얼음 위에 하얀 이불 서리 내리고 썰매 타다 미끄러져 피멍 든 손바닥 호호 불며 울던 곳
똘강은 지금도 내 혈관을 타고 돌아 흐른다 투망으로 잡은 고기 바께스에 눌러 담던 아버지의 든든한 어깨가 그리운 건 나도 철이 들어감일까
장만호 시인 / 무시로 흐르는 강물
산다는 것 무시로 흐르는 강물 희비애락의 멍에 조금씩 내려놓은 연습을 하다 보면 영육 간 존재하는 자아 성찰의 시점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
밤하늘 별이 아름다운 건 잡을 수 없는 피안의 열망
삶 꿈속의 꿈이라지만 살아있음에 감사하자
연어는 목숨 걸고 회귀 하지만 알을 낳으면 죽는다는 사실 알고 살았을까?
허무한 인생사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설거지 뿐
장만호 시인 / 사기 -숲의 역사
1 사랑은 죄였다 특히 상대의 허락 없이 홀로 얼굴 붉힌 죄, 한 세계에서 추방당한 것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가벼운 죄를 지은 것들이 바람에 떠밀려왔다 보다 무거운 것들은 짐승에게 먹힘을 당하고도 여러 번, 저희의 죄를 되새김질당한 후에야 둥근 뼈 부서져 이곳에 던져 졌다 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뿌리내려야 했다 수맥의 지도를 펼쳐 들고 잇몸인 붉은 흙에 단단하게 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래도 미심쩍은 것들은 발등에 부적 같은 버섯을 땅땅 박아 넣었다 집성촌을 이루고 형벌의 상형문자로 수형도를 그렸다. 비나 눈에도 지워지지 않을 푸른 족보를 엮었다 그러나 사랑은 죄였다 푸른 귓바퀴에 새들을 길러 계명을 묵송케 하고도, 저녁의 흰 거미를 먹여 팔방의 무늬에 수정빛 염주를 매어달고도 사랑은 죄였다 해마다 생겨나는 그리움의 나이테를 지울 수 없다면 사랑은 아픈 죄다 때때로 바람에게 몇 벌의 옷을 벗어주고야 얻어들은 풍문에 온몸은 열병 들고 겸손한 겨울날 이 삶은 나에게 너무 힘들다. 고백의 엽서들을 보내고 물도 밥도 먹지 않을 때마다 아프게 죄어오는 형벌의 테, 버림받은 자 누구도, 다시 버릴 수 없다 섭리의 목책에 갇혀 마르고 옹이 박힌 손으로 저희들의 그리움을 후려치며 밤이면 짐승처럼 엎디어 살았다
2 궁형(宮刑)당한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죄짓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장만호 시인 / 개망초 연가
엄마별따라 밤 마실 나온 아기별들이 오불조불 졸다가 그만 강가에 떨어져 개망초가 되었다는 전갈을 받은 이른 새벽이다
목놓아 울어대던 개구리도 고단한 몸으로 잠을 청하는 시간
밤새 배부른 새벽이슬은 어두운 밤하늘의 아기별들을 찾아 반짝이는 엄마별들의 눈물은 아니었을까?
밤이면 강 가에서 엄마별들의 소식을 들을까 눈빛을 반짝이며 강변을 하얗게 물들이는 개망초들의 슬픈사연에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도 초여름 짙은 녹음을 달래며 밤잠을 설치리라
별들이 반짝이고 개망초가 흐드리게 핀 이 밤 묵묵히 흐르는 강물에 수취인 불명의 연서를 띄운다 아름다웠다고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고 오는 칠 월에는 세상 근심 걱정 다 내다 걸고 개운한 새옷 갈아입고 춤추고 싶었는데
하늘나라 엄마별들의 눈물잔치 애처롭겠다 그래서 일까 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별빛에 반짝이며 이 마음을 유혹하는 개망초를 사랑할 수도 없다 언제쯤이면 이 마음을 알아줄지 연잎에 내려앉은 밤이슬 불러모아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싶다
장만호 시인 / 청어
그대가 사랑을 잃었다 후두둑 바람이 들창을 넘는가 모퉁이 술집 빗방울 달려와 어깨를 치는데 그대 웃음이 흠집 많은 탁자 같다 이슬 맺힌 술잔을 매만지거나 청어의 살을 바르며 그대를 가려줄 우산이 나에겐 없다 처음 그대가 청어를 제일 좋아한다 했다 깊은 바다의 푸른 지느러미....... 그러나 푸드덕 추억 지나간 자리 드러나니 이 남루한 등뼈 창 아래 바랜 벽지 젖어 오랜 이름들 잉크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본다 흔적이 상처가 되는 것을 본다 흐린 불빛들이 몸을 뒤척이는 이 저녁 이운 하늘 아래로는 물의 그물들, 그대와 나에겐 푸른 지느러미가 없다 한세상 유영할 추억의 힘이 없다. 그러나 그대 우리가 산다는 것이 이렇듯 가시 많아 제 몸 찔러오는 것이라도 때로 상처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억만장 깊은 물속 아픔을 헤치며 맨살의 힘 남루한 등뼈나마 한 길 가야만 하리라 저기 물 밀어 가는 청어 두 마리
장만호 시인 / 처음 보는 나무처럼
교수님, 저는 시민이 될 거예요 시창작 수업을 듣던 그때 그 아이
윈도우 안에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끝없이, 손에 턱을 괸 자세로 바라보는 먼 아마, 영원이 있다면 그곳일 것 같아서
손바닥 위에 얹힌 총신처럼 고요하고 무심한 눈빛이 향하는 영점 너머로 네가 가고 싶어 하던 숲은 있어서 너는 저 너머를 건너는 거짓말처럼* 아니, 거짓말처럼 거기서 시를 쓰고 있겠구나
선생님, 저보고 네가 만호 형 제자구나, 그러는데 뭔가 기분이 좋아지데요. 하하하 그때처럼 웃으며 너는 지금 어떤 시를 쓰고 있겠니, 윤달이 들어서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그리고 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한 그 화구에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는 먼 곳, 먼 곳이라 중얼거리며 내가 잡을 수 없는 먼 연기緣起를 생각했었다
선생님, 저도, 공간으로 석사논문을 쓰겠어요 그래, 나는 박재삼 썼었는데, 하하하 저는 김춘수를 쓸래요 평생 통영에서 살 거니까요, 엄마와 함께요 그 통영이라는 말이 이젠 내게는 통점이 되었다
허공울 향하는 나무의 자세가 나무를 결정허듯 너는 지금도 내가 모르는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어휘처럼 처음 보는 나무처럼, 매야 너는 그렇게 보고 있구나
*김희준 시인, 「제페토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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