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을원 시인 / 폐허는 푸르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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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을원 시인 / 폐허는 푸르다
마을 외진 곳, 고단한 몸 점점 길게 눕는 집 어둠 깊은 광, 녹슨 자물통 하나 쪼그리고 홀로 저물던 저녁 아궁이 앞 오랫동안 환했다는데 달도 앓던 무명의 밤 그 아궁이 툭! 꺼지고 오랜관습으로 스스로를 단단히 채워버린 집 자물통 하나가 버티는 집 밤마다 조금씩 유실되는 집 저 문이 열리는 날 폐허의 족보가 하나 둘, 걸어 나오면 저 집도 한복 곱게 갈아입고 이승의 기억 온전히 버릴 것인가 늦가을바람이 안부삼아 놓고 가는 그러나 함부로 발 내디딜 수 없는 폐허, 여전히 누군가의 집
최을원 시인 / 목련나무 아래로 가다
그곳에 목련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노래의 잔뼈들만 떨어져 쌓이고 우연처럼 바람이 불면 녹슨 목련꽃잎보다 더 빨리 지고 싶었네 노을 속으로 도시가 서둘러 가면 지친 노래가 서둘러 고샅길 내려갔었네 그런 날 밤마다, 하숙집 낮은 창을 밤새 두드리던 그 목련나무, 대책없는 젊음이 파지로 싸이고 나서야 잠들던 새벽녘 꿈은 폐비닐처럼 찢겨 담벼락에 꽂힌 병 조각 끝에서 펄럭 거렸네 지금도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화라락, 화라락, 꽃잎 지는 소리 들리네 떨어진 자리마다 붉은 녹물이 배이네 몇 개의 낯익은 거리들이 순례자처럼 찾아오면 오래된 노래가 주섬주섬 대문을, 또 나서네
최을원 시인 / 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계단은 늘 허기진다 겹겹이 접었던 각진 살의를 반쯤 펼친 채 누군가의 발목을 노리는 저 많은 이빨들 오르가즘을 달려 오르는 가속의 덩어리, 옥상을 지나 난간을 넘어 던져버리는 거 던져지는 거 누군가는 순식간에 발목이 잘렸다 언젠가는 한 가족이 몸땅 실려갔다 사회면마다 계단이 물어뜯은 흔적들, 고시원의 계단엔 주인잃은 신발들이 지천이다 계단은 어느곳에도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깊은 산문에도, 웅장한 교회당에도 계단은 자란다 룸살롱 여자의 젖가슴 사이를 지나간다 하여 계단은 아름답다 경건하다 계단을 잃어버린 자들이 복권 판매소 앞이나 경마장 같은 광장 주변을 서성일 때 보험사들의 빌딩은 나날이 키를 키운다 절대의 성실함으로, 무자비한 집요함으로 추락의 마지막 순간까지를 사정의 쾌감으로 바꿔 버리는 그것, 폭식의 밤은 깊다 먹잇감들은 바쁘게 몰려들고, 지친 사람들이 자신의 해골을 들고 아득한 계단을 오르는 취몽에 들 때도 도시의 곳곳 화려할수록 어둠 속에 더 깊이 숨어, 번득이는 눈빛, 짐승처럼 은밀히 숨고르는 소리들
최을원 시인 / 자전거포 노인
노인의 손이 닿자 어린 자전거가 신음을 베어 문다 굳은 나사를 틀어 바퀴를 빼내는 노인, 타이어 찢긴 틈으로 고샅길들이 비어져 나와 있다 전봇대들이 취한 눈알을 부라린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욕설을 닦아낸 후 상처를 찬찬히 싸매 주는 노인, 비틀린 틀을 곧게 펴고 날카롭게 굽은 바퀴살을 하나하나 펴준다 날카로울수록 약한 법이지, 나사를 단단히 조이고 힘있게 펌프질하자 자전거 깡마른 몸에 탄탄한 근육이 부풀어오른다 축 늘어진 체인을 손본 후 페달을 돌리자 자전거가 된 숨을 토해낸다 고개 숙인 핸들을 툭툭 쳐보는 노인, 이런 것은 치욕이란다, 노인의 팔뚝에서 힘줄이 꿈틀하자 자전거 굽은 등뼈가 꼿꼿해지며 숙였던 고개가 세상 한가운데를 향해 슬며시 들린다 그러자 라이트 속에 멈춰져 있던 사람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차해 있던 트럭이 벌컥벌컥 출발하고 수족관의 생선들이 펄떡인다 짐받이에 집 한 채 실은 자전거가 세상 속으로 질주해 간다 도시의 먼 휘어진 길을 돌 때까지 자전거 어깨에 노인의 커다란 손이 얹혀 있다
최을원 시인 / 미시령을 향해 달리다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 홍천, 인제를 지나 미시령을 향해 달렸네 좁은 국도를 시속 100km로 코너링하다 보면 참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 약간의 핸들 각도에 좌우되는 생 급하게 꺽인 곳에 예각을 찍고 길 밖으로 나간 흔적 하나 선명했네 강변의 갈대들은 모두 지친 머리를 꺾고 이 각도를 보라. 이 각도를 보라 자꾸만 속살 거렸네 러브호텔에 욕망을 주차한 많은 차량들 어느 지점에서부터 꺽이기 시작했을까 미시령너머를 막연히 사모하는 나도 꺾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세상은 점점 뜸해지고 나도 뜸해져 갔네 마음의 각도 사이에서 미시령은 높아만 가는데 구부러진 것들은 슬픈 것 위태로운 각도를 품은 것 페드라, 페드라를 외치며 내 차는 스스로도 두려운 속도로 마음의 북쪽. 후미진 늦겨울 속을 질주해가고 있었네
최을원 시인 / 환승(換乘)
야산을 오르다 보니 파묘한 자리가 있다 잡풀들이 자라고 개망초꽃, 들국화 몇 송이 피어 있다 들어가 눕자 송장나비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아늑하다이 좋은 곳을 두고 망자는 어디 갔을까 죽어서도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하는가보다 하늘에는 무덤들이 둥둥 떠간다 쫓겨가고 있다 죄다 서쪽으로만 간다 팔다리를 쫙 펴니, 딱 맞다 이렇게 딱 맞는 곳은 한 번도 없었다 들고 있던 소주병을 밖으로 던지니 매미들은 더 큰 곡소리로 울어대고 새 주인을 아는 양 나비들이 날아든다 머리에 얼굴에, 어떤 놈은 잠 속까지 따라 온다 길들의 가지들이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공중부양하는 거 같다 깜박, 깨어나면 낯선 곳, 나도 나를 모르는 아주 낯선 시간대에 거짓말처럼 닿아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 저벅저벅, 취생몽사의 이마를 밟으며 곁을 지나친다
최을원 시인 / 소파, 부재에 관한 보고
사내의 집은 소파다 소파에서 출근해서 소파로 퇴근한다 휴일, 그는 낯선 도시의 발도장이다 대문 앞에는 도장자국 투성이다 동네를 몇 바퀴 더 소주병처럼 굴러 다녀야 출근부가 접힌다 소파는 밤새 사막이요 광장이요 자궁이다 취한 꿈속에서 늘 사막의 여우를 만나지만 여우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다 어젯밤 그는 가로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에 갇힌 물음표들, 그 작은 날개의 파닥거림이 그는 퍼뜻 무서워졌고, 소파를 떠올렸고 가능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도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새벽을 나선다 헛구역질하는 골목도 그를 눈치 채지 못한다 엄마 여기 누가 자, 외쳤던 어린 딸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그 집에는 그녀도 없다 없는 그녀가 식탁을 차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 친구 또는 애인을 만나거나 그 소파에서 케이블채널을 돌린다 그 여자는 영화광이다 한 편을 끝까지 감상한 적은 없다 가끔씩 깨어 아무도 없네 두리번거리다 다시 잠든다 거대한 강낭콩 줄기가 소파를 뚫고 지붕을 뚫고 끝없이 하늘 오르는 장면이 자주 상연되는 꿈속엔 넓은 잎새의 초록이 싱그럽다 오늘은 맑은 날, 그녀는 모텔을 되돌아 본다 그녀는 영원을 믿지 않는다 가고 싶다 꼭 한 번만 돌아가고 싶다 무심코 중얼거리자 맑은 하늘 빼곡이 초록의 잎새가 드리워 진다 건물들의 윤곽이 탁 풀리자, 그녀는 깔깔깔 웃는다
그 집은 오늘도 부재다 아이들은 혼자 먹는 밥에 다들 익숙하다 거실의 어둠 속에 소파가 떠있다 없는 집에서 없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누가 좀 저 불을 켜주었으면, 소파 혼자 간절히 생각하는 창밖 어긋난 별들이 영원의 궤도를 도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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