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혁 시인 / 지붕과 이야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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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혁 시인 / 지붕과 이야기
엄마,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자식, 얘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기까지 끌려왔으며 다 끌려오고 보니 하늘이 노랗고 많이 숨이 차고 그럼에도 탐스러운 열매 같은 것이 뚝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고요
집,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자기 사연 말하게 하는 힘이 있죠 돈이든 추억이든 밤에만 들어와 눈 잠깐 붙이고 다시 일을 나가더라도 집은 나중에 돌아볼 때 아주 긴 시간을 되돌려주는 힘이 있지요
말 나온 김에 일, 이야기 하자면 가난하게 산 것도 넉넉한 것도 아니었는데 생활이라는 문을 괜히 열어도 보고 닫아도 보면서 우리는 행운에 목말랐던 것 같습니다 책상 앞에 앉으면 매일이 익숙하고 떨리는 학예회 같았어요
개와 고양이, 이야기는 대개 귀를 기울이죠 그렇지만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하나 갔다고 다른 것을 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책, 얘기를 꺼내면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인데 그리 사로잡혀 살아온 건 아니었어요 여기 있는 책 다 읽은 거야? 묻는 사람도 있고 얘기를 더 해보자 덤비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 친구 같아요 그 친구보다 쓸모없이 산 것 같습니다
사람도 차도 한적한 소로의 경계석 위에 서서 유치원 하원 차량 기다리는 저녁이든, 우리집 못 찾는 지인을 마중나온 주말이든 대단히 우스운 이야기로 사람 맞이하고 싶은데
뉴스, 얘기를 꺼내면 다들 좋아합니다 그렇게 살게 될 분이 아닌데, 그렇게 죽을 애가 아닌데 하다가 너도 나도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났다는 결론으로 끝이 나요
사랑, 이야기는 이미 나눈 것과 마찬가지죠 잘 모아둔 곡식을 한겨울 깊은 산골에 틀어박혀 파먹는 우리는 우리를 덮은 지붕과 이야기를 왜 이토록 사랑하는지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3. 6
김상혁 시인 / 산림법
삽이 박힐 만한 무른 땅을 찾아 겨울 산을 헤매며, 그래도 죽음이 차례를 지켜주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묻고 아버지는 태웠고 오늘은 고양이를 숨기러 가는데, 마지막엔 항문이 열린다는 수의사의 말이 떠올라 엉덩이에 힘주며 비탈을 올랐다. 할아버지는 멀리 시장에서, 아버지는 옆방에서, 고양이는 나의 품에서 죽었기 때문에 처음엔 그저 희미하던 그 느낌이 내 쪽으로 가까워온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반짝이는 작은 각삽을 어깨에 걸치고 더 은밀한 쪽으로 들어갔다. 한 겨울 추위에 떨면서, 산림법 위반을 염려하면서 죽음을 슬퍼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산비탈 어정쩡한 곳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그들의 뺨이며 어깨를 죽도록 두들기며 큰 소릴 냈던 게 떠올라서 갑자기 무안했다.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
김상혁 시인 / 떨어지는 동전
거스름으로 받은 동전 하나가 우연히 손에 쥔 그것이 어쩐지 소중히 여겨지는 날이 있다네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그 소년도 어느 날 그리 흔한 동전 하나에 연연하게 되었지 마른 빵 하나 값을 치르기도 부족한 동전을 거슬러 받고는 그것이 그날의 모든 운수인 양 놓지 못했다네 손에 쥔 하나를 아침부터 놓지 못했어 형들은 씩씩해서 곧잘 절벽에도 오르고 힘이 센 아버지는 날카로운 도끼를 만지는 목수 아름다운 어머니는 부엌에서 종일 불을 다룬다 동전을 쥔 소년의 손에 땀이 흐르네 식탁에서도 변소에서도 그것을 놓지 못해 여리고 하얀 주먹이 나쁜 냄새를 풍겼지 형들이 다 눕고 아버지가 코 골고 어머니마저 잠들자 이불 밑에서 소년이 속삭인다 '내가 우리의 행운을 지키고 있었어요.' 우연히 손에 쥔 동전이 어쩐지 소중한 날 마른 빵 하나 값을 치르기도 부족한 동전을 거슬러 받고는 그것을 쥐고 잠든 날 이제는 그날의 모든 운수인 동전이 이제는 깊은 잠에 빠져버린 소년의 그 동전이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
김상혁 시인 / 자장가
네가 잠들면 너에 대하여 나는 하는 일 없네 나의 목소리가 열린 어깨처럼 환해지는데 나라는 밧줄을 너 없는 바닥까지 늘어뜨리네
(우리는 어제 싸우고 오늘 싸웠지 화가 안 풀린 날은 밥상 앞에서 밥알 세는데 끈기 없는 생활이 꿈의 바닥에 쏟아져 있다 부족한 사랑은 꼭 비유되더라, 더 늦은 밤으로 도망치더라)
네가 잠들면 너에 대하여 나는 하는 말 없네 나의 침묵이 열린 가슴처럼 들뜨는 중에 나라는 밧줄을 너 없는 바닥까지 늘어뜨리네
(뭐든 해주는 사람이란 얼마나 좋은지 오라면 오지 여기 먹으라면 먹지 혼자서 야근하고 들어와 식은 아침밥 긁어대는 사랑의 위장아 너는 이런 말도 하지 너 같은 거 죽어버려 처음 우리 만나던 그때처럼!)
네가 잠들면 비로서 널 구해주고 싶네 나라는 썩어버린 밧줄을 너 없는 바닥까지 늘어뜨리네
김상혁 시인 /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
오래전에 죽은 할머니가 어디 산책하고 돌아온 것처럼 현관문 열고 들어올 때 죽도록 소리를 지를지 그녀를 안아줄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
더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 위독하니 무슨 병원 찾아가 손 한번 잡아주라 그녀가 조심스레 부탁할 때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릴지 이 불길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지는 또 당신의 선택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쏟을 시간과 정성 다 모아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다 죽은 영혼 앞에 한 다발 꽃으로 엮어 가져갈 때 당신은 세계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지 아니면 이 세계가 선한 사람을 나약한 사람으로 하나둘 대체하고 있다고 느낄지
나쁜 아버지가 죽고 나쁜 어머니도 죽었는데 그들이 내 강아지 짖는 문밖에 저녁으로 돌아올 때, 현관문 열고 나가서 멀어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확인할지 블라인드 내리고 숨죽일지는 당신의 선택
자식도 없으면서 자식 잃은 부모 마음 운운하는 친구는 너무 시끄럽고 무름병 걸린 과실수에서 성한 열매 골라내는 이웃은 너무 평화롭다 느끼는 당신에게 오늘 하루 잘 견딘 선물로 술 한 병을 줄지 조용한 문장 하나를 줄지도 역시 스스로의 선택
그러다 화구 속에서나 뜨거워 잠에서 깰지 아니면 사는 동안 무슨 이야기라도 될지 하여튼 할머니 할아버지는 있던 데로 돌아갔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온 당신이 과연 어떤 영혼을 눈 비비게 만드는 먼지가 되느냐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학동네,2023)
김상혁 시인 / 정원은 결심했다
나는 마루한가운데 박힌 커다란 못이었다. 정원은 결심했다
정원이 자랄수록 못의 깊이는 차츰 깊어졌고 정원의 부모는 이미 노쇠하여 풀 한 포기 뽑을 수 없었고 이를 어째, 이 불편한 것을, 하고 주저앉아 솟은 못대가리만 어루만졌다
나는 잠들지도 먹지도 않는다, 정원은 결심했다
그러니 정원은 곧 죽을 수밖에 마루에 못 박힌 채 남을 수밖에 없었고 멀리 가더라도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원은 거짓말 못하는 착한 아이다. 자기 사망을 감출 리 없다, 정원은 결심했다 아침저녁 아버지 손을 잡아줄 사람은 나다, 새벽에 화장실 찾는 어머니를 부축할 사람은 나뿐이다
'노인들은 지난 시대와 결별하기 어렵다'는 말이 라디오에서 흐를 것이라고,
어둠 속에 비스듬히 서서 결심했으나 정원은 불 꺼진 마루 한가운데 박힌 채 부모 곁에서 무한히 깊어지는 못이었다
김상혁 시인 / 내가 생각하는 새는
내가 생각하는 새는 얼굴을 가져야 해서 바위에 부리를 깨뜨리고 새로운 그것을 구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새는 크고 날지 않는다 들판을 질주하고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고인(故人)과 여자들을 친구라 부른다 나뭇가지에 앉아서 풍조를 즐길 바에야 줄기를 붙들고 세게 흔든다 사람처럼 울면서 내가 생각하는 새는 그런 사람처럼 굴지만 나의 생각에게 또다른 한 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재회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오후 마을로부터 피어오르는 홍연에 입을 찍으며 사람의 행복이란 붉은색 입술로 행복에 대해 말하려는자에게 입맞추는 것이라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새는 그 생각 속에서 다만 목수가 되려는 꿈을 갖는다 울음으로 흔들던 나무의 참된 주인으로 의자에 앉아 풍향과 요행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내가 생각하는 새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태중임을 자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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