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경희 시인 / 빈집 한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3. 08:00
박경희 시인 / 빈집 한채

박경희 시인 / 빈집 한채

 

 

내 안의 사랑은

빈집 한채를 끌어안고 산다

 

수돗가 세숫대야의 물을 받아먹고 살던

향나무 한분이 사랑채 지붕으로 쓰러진 건

그대가 떠나간 뒤부터다

 

툇마루에 옹이가 빠져나가고

그 안으로 동전과 단추가 사라진 집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조심스러워졌다

 

툇마루 옹이 빠진 구멍 속

거미의 눈으로 바라보는 내 안의 사랑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먼 산으로 돌아앉은 그대

 

별을 세다가 새벽을 놓치고

쓰르라미 울고

 

 


 

 

박경희 시인 / 벚꽃 문신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문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 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논바닥에 경문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리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뒹굴었으리라

바퀴가 등을 지나간 뒤

핏물 위에 가득했던 꽃

울지도 못하고 깨진 창문에 덧댄 비닐처럼

벌벌 떨었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졸았다

경문기와 씨름한 샅바가 붉게 물들어

아버지 등에 감겼다, 병원에 가자고

듬에 손을 얹은 어머니의 눈물

뒤집어지던 꽃잎 훌러덩훌러덩

등에 새겨졌다.

 

 


 

 

박경희 시인 / 생강꽃처럼 화들짝

 

 

 윗집 사람과 아랫집 사람, 싸움이 났다 담장 넘어온 닭 때문이라지만 두 분 사랑싸움이다 산 고개 여러 번 넘은 정분이지만 딱, 그만큼이다 된장찌개 끓인 날은 아랫집 사람의 순정이 윗집 마루에 슬그머니 놓여 있다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 빠트리고 싱겁네, 물이 더 들어갔네 구시렁구시렁 웃음으로 넘어간다 마당에 풀어논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으며 아랫집 담장 밑을 서성이고 윗집 사람 속을 읽는 닭이 그저 모가지만 냈다 뺐다 찍었다 헤치다 요래조래 왔다 갔다 서로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생강꽃처럼 화들짝, 화들짝 눈깔사탕 한 봉다리 뒷짐에 얹고 슬그머니 아랫집 방문 문고리에 걸고 오는, 윗집 사람의 봄날이 생강꽃밭으로 날린다

 

-『서울경제 / 시로 여는 수요일』 2023.09.13.

 

 


 

 

박경희 시인 / 보따리

 

 

대기실 의자 위 해진 보따리 놓여 있다

찬찬히 훑어보니

 

잦은 비로 들깨 조금 나왔다고 구시렁 구시렁 들기름 한 병

팔월 뙤약볕에 고꾸라져 열병 앓은 고춧가루 봉다리

크림 맛이 좋아 산삼립빵 세 개

이 콩 저 콩 넣다 보니 천장 위에 쥐눈이콩 두 됫박

젖은 이파리 밟아 자빠져 여러 날 병원 신세 진 취나물 한 봉다리

구부러진 산등성이 뱀 밟아 벌러덩 고사리 두 두름

열하나 자식새끼 제금 내주고 주렁주렁 매단 호박고재기 세 두름

깜박깜박 놓치는 정신줄 붙잡자고 줄줄이 꿰맨 곶감 봉다리

 

향천리 버스 떠나는 줄 모르고

난로 옆에 졸고 있는 할매 한 분

 

 


 

 

박경희 시인 / 담양행 버스

 

 

담양행 버스를 탄 순창이 고향인 딸이

여든한 살 어머니를 두고

내내 좌불안석이다

쪽진 머리에 앉은 나비 핀이 반짝이는

어머니는 내내

딸이 잘 탔는지 버스 안을 들여다본다

분홍 꽃무늬 블라우스로

딸이 손짓하고

환갑을 넘긴 딸은 눈가 주름 같은 안타까움으로

딸을 보내는 어머니는 손 주름 같은 안쓰러움으로

허리춤에서 돈을 꺼낸 어머니

하드 두 개 사 들고 버스에 타고

분홍 꽃무늬 블라우스 속에서

꽃으로 핀다

'아가 잘 가라'

담양행 버스 안

나비 한 마리

꽃에 날아간다

 

 


 

 

박경희 시인 / 통박꽃

 

 

박 중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박은

바가지로도 쓸 수 없고

죽도 뜰 수 없는

통박!

쪽박도 면박도

통박에 비하면 깨진 박 축에도 못 끼는데

마흔이 다 된 게

밥물도 맞출 줄 모르느냐고

고두밥도 모자라 쌀이 씹힌다고

국수는 오래 삶아야 속까지 익지

예산 국수공장에서 금방 뽑아 왔느냐고

시금치나물은 살짝 익혀야지

흐물흐물해서 어디 씹히기나 하겠느냐고

소금은 순금으로 만들어

그리 귀해서 간이 싱겁느냐고

두릅은 나무둥치를 잘라서 했느냐고

씹으면 그나마 남은 이 다 부러지겠다고

금니 박아줄 수 있느냐고

그깟 글 나부랭이 써서

어느 세월에 똥구멍에 볕 들 날 있겠느냐고

고향 집에서 돌아오다 바라본

참말로 환장하게 환한 꽃!

박꽃!

 

 


 

 

박경희 시인 / 화투판에 그리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화투를 친다

광을 팔아야 하는지 내버리고 나가야 하는지

서로 눈빛만 주고받는다

삼광이 번쩍이는 형광등이 발발거리고

아부지 언능 죽으세요 며느리 말에 발끈한 아부지

시아버지한테 언능 저승 문턱 밟으라니 허, 참나 내가 헛살았구먼

얼굴 벌게진 며느리가 말도 못 하고

화투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판을 엎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만가만 눈치만 오간다

옆에서 손녀가 할아버지 죽어? 죽어? 한다

넘어진 김에 코 박는다고

며느리한테 속 안 좋았던 것을

화투판에 그린다 번들거리는

똥광 틈새로 흔들리는 며느리 눈동자

갑자기 엄니가 판을 엎는다

무슨 놈의 화투판에 저승이 나오느냐고

죽으라면 죽지 죽을 판에 죽지 않고 뭐하느냐고

저녁 잘 드시고 곡소리 나오겠구먼

꽉 찬 달이 안방을 들여다본다

 

-시집 『벚꽃 문신』(실천문학, 2012)

 

 


 

박경희 시인

1974년 충남 보령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시안》 신인상 수상. 시집 『벚꽃 문신』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