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시인 / 돌아가셨다는 말 외 6편
|
황유원 시인 / 돌아가셨다는 말
참 좋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 천지이지만 돌아갈 곳 아무데도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돌아가고 나면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거
누구나 결국 돌아가고 누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 어디로 돌아갔는진 모르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처럼 그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몇 년 사이에만 해도 정말 다들 돌아가셨다는 거 말은 가끔 씨가 되고 돌아가시다, 라는 말이 있어 우리 모두 돌아갈 곳 생긴다는 거
참 좋다 늦은 밤 장례식장 갔다 돌아와도 도무지 돌아온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그런 날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말의 씨에서 싹이 돋아나 흙을 뚫고 청청하게 솟아오르는 상상에 젖다보면 어느새 세상모르고 다들 잠들어 있다는 거
황유원 시인 / 무한대의 밤 몇 달간 밤잠을 설쳐가며 두꺼운 벽돌 책을 다 번역하고서 마침내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그동안 밀린 한숨을 한꺼번에 휴우—내쉬었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 간밤에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을 했다 나는 너에게 별 의미가 아니었나보다,하고 좌절해 혼자 술을 마셨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고서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인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우리집 강아지는 늘 잠이 덜 깨 있었고 잠이 깰 때쯤 다시 잠이 들어 밤과 낮을 찬물과 더운물처럼 뒤섞었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 장자를 만나 물었다: 제가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북 치고 노래 부를 수 있을 실력이 되겠습니까? 장자가 무시하고 말했다: 걔네 잘 지내? 노자가 말했다: 잘 지내긴 다 죽었지 걔네가 나이가 몇인데 자고 나니 내 차례였다 원래 없던 게 없어졌는데 슬플 게 뭐가 있느냐는 맹인 보르헤스에게 알바비를 받고 책을 읽어주던 소년이 말했다 괜찮으면 다음번엔 네가 한번 해볼래?나는 보르헤스에게 내가 쓴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 시간 동안 그를 여섯 번 웃겼고 마지막에 한 번 울렸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비밀을 모두 파헤치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 첼리니가 다음날 메두사의 목을 쳐든 페르세우스 동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속옷에 사정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다음은 네 차례야”라고 말하며 내 항문에 불끈거리는 자지를 쑤셔넣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낚싯바늘을 삼켰다 나는 한 마리도 아닌 네 마리 제주 은갈치였고 바늘을 삼킨 순간 이제 다 끝장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다 끝장이 난 나는 뭍에 올라 식탁 위에서 환히 파헤쳐지기 직전,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대들었고, 아버지는 내게 불같이 화를 냈으며, 나는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아버지의 목을 힘껏 졸랐다 주먹으로 머리 위 베개를 내리치는 동시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 꿈은 진짜가 아닌 것들과 가짜가 아닌 것들로 뒤섞여 있었고 동창회에 가서 자식 자랑을 실컷 하고 친구들에게 등신 소리를 들었다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태어나서 스무번째로 생각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이제 학부모가 된 너와 둘이 따로 만나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갑자기 술 취한 인간 하나가 내 옆에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나는 손에서 술잔을 떨어뜨렸지만 그거야 어찌됐든 비명을 지를 때만 우리 인생은 조금이나마 가치 있어지는 것 같다 으아악! 깨고 나니 꿈이었다 더이상 아무 일 안 해도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더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이제는 다들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사실 우리가 앞으로 보내야 할 시간은 이미 다 흘러가버렸는데 우리의 인식 속도가 따라가질 못해 흘러간 시간을 아직도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는 거란 얘길 들었다 어째 기쁠 때도 은근 늘 허무하더라니! 깨고 나니 꿈이었다 산속에 텐트를 치고 살았는데 자연인 프로그램 팀이 와서 먹을 것을 주고는 대신 촬영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깨고 나니 차가운 텐트 속이고 나는 또 혼자고 시간은 밤이고 너무 추워서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울었는데 콧물을 닦을 휴지가 없어 대충 손으로 닦고 바지에 비볐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이곳은 천국입니까 지옥입니까? 천국도 한순간에 지옥이 되는 법이고 지옥은 멀리서 천국의 천국됨을 묵묵히 지켜주는 성인에 다름 아니니라 깨고 나니 지옥이었다 지옥 덕분에 천국도 있는 거란 사실을 잠시 위안으로 삼았다가 천국을 없애면 지옥도 사라질 거란 생각에 천국을 없앨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깨고 나니 천국이었다 천국에서 나는 너무 배불리 처먹어서 천국을 폭파해 지옥을 구제해야겠다는 의지조차 상실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꿈이었지만 기분 더러웠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깨지 않는 꿈이었다 깨지 않는 꿈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아니 이게 얼마짜린데…… 흑흑…… 깨고 나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모든 게 다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무 위에서 녹은 눈물이 얇게 쌓인 눈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고 듣다가 눈을 감고도 들었다 눈이 물을 맞고 사라지는 낮은 볼륨의 소리를 이것은 꿈이 아니고 내가 방금 실제로 겪은 일이다 이 글을 메모하느라 장갑을 벗은 한쪽 손이 얼어가고 내 머리 위로는 계속해서 녹은 눈물이 떨어져내린다 —이봐요, 가속도가 붙었을 때는 멈추려 해도 도무지 멈춰지질 않아요 —그렇다면 뛰어내리는 수밖에 깨고 나니 꿈이었고 아직도 꿈은 달리는 중이었고 깨고 나니 꿈이었고 어느새 다시 꿈속이었다 레퀴엠을 듣는 검은 풍뎅이가 등에 나를 태우고 달렸다 나를 태우고 집안 구석구석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먼지 쌓인 식탁 아래와 벽장과 책장 틈새…… 검은 풍뎅이는 나의 상여로구나 어린 시절 밟아 죽이고 굶겨 죽인 모든 검은 풍뎅이들이 나의 지옥이었구나 이제 나는 그 검은 풍뎅이 위에 올라타 온갖 더러운 곳을 다 가봐야만 하는구나 가보지 못한 더러운 곳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커다란 공처럼 뭉쳐진 먼지와 먼지와 먼지의 산을 넘고 또 넘어…… 깨고 나니 꿈이었다 하얀 불이 켜지면 점점 자라나기 시작하는 등갓에 수놓인 흰 꽃 깨고 나니 꿈이었다 어느 시에선가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물이 든 병에 천천히 꽃다발을 꽂아주듯 병든 꽃다발에 천천히 물을 부어주듯 서로 상처 주고 또 용서하고…… 깨고 나니 꿈이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온갖 형형색색의 꽃들이 그대로 인해 피어났어요 단 하룻밤 만에 이상한 봄이 왔어요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나는 꽃이랑 열대지방에 피어나는 길고 커다란 꽃들이 모두 한꺼번에 난 사진 찍는 거 싫어하는데 그 꽃을 그 모든 꽃을 모조리 다 찍을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찍어 간직했죠 오직 그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 한 장 한 장을 모두 기억했어요 그대는 내게 말했죠 네가 이렇게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게 그대 때문이라고 말해요 이상한 봄이 왔어요 그대로 인해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대로이긴 한데 난 그대에게 이게 다 당신 때문에 핀 거라고 당신은 내게 이제 너는 너무 자유로워졌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꾼 적이 없어 나는 눈물이 흘러 전 세계의 모든 계절에 피는 꽃들이 다 피어 있는 언덕, 거기서 난 눈을 떴는데 눈을 뜨고도 생생한 꿈이어서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 무한대의 밤을 그어 한번 터진 환희는 과연 멈출 줄을 모르고 깨고 나니 꿈이었다 그리고 봄이 왔다 속에서 멈추지 않는 환희를 견디며 흔들리는 마이크처럼 휘청대는 한 그루 꽃나무 입속에 집어넣은 구름이 온몸의 상공을 떠돌다 전부 돌아올 때까지 단꿈을 꾸네 그런 노래가 들리는 듯한 봄꿈을 꾸었다 멀리서 우레가 운다 우르르르르 거인이 울려다 울음을 참는 것 같아 거인의 등허리 위에 낀 이끼들이 우르르 지반을 이탈하려다 다시 고요를 되찾은 것 같아 멀리서 우레가 우니 좀 간지럽고 괜히 슬프군 애인이 혼자서 울다가 내 생각에 울음을 그치고 불을 끄는 것만 같군 이것은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고 올해 첫봄의 천둥소리가 이내 심금을 울리노라 이것은 영화에서 들은 대사인지 내가 쓴 대사인지도 모르겠고 사실 나는 요즘 현실감각이 극도로 희박해졌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 어릴 때 내가 부화시킨 개구리 알이 몇 개였던가 다리 난 올챙이들이 화초 끝까지 기어올랐고 그때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깨고 나니 채 뒷다리도 나기 전이었다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나도 몰래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마치 생각이라는 게 머리에 붙어 있는 흙먼지라도 된다는 양 깨고 나니 머리가 흙속에 처박혀 있었다 깰 필요도 없는 꿈이었다 그 꿈은 현실 그대로였고 샤토브리앙의 비문 파도와 바람 소리만을 듣고 싶어한 사람을 위한 해변의 묘지 얼마나 좋을까 파도와 바람 소리만 듣고 살 수 있다면 그러나 파도와 바람 소리만 듣고 살 순 없는 노릇이고 파도와 바람도 실은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고 세상에 샤토브리앙이 원한 파도와 바람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파도와 바람만을 원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하여튼 나는 해변의 묘지에 홀로 선 채 그 비문을 읽으며 감격에 겨워 있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이번만은 깨지 않았으면 했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 뿌리(Puri)의 골든비치에서 봤던 파도치는 화장터 스와르가드와르, ‘천국의 문’을 생각하면 언제나 시체 타는 냄새와 함께 거대한 파도 소리가 밀려온다 거기서 불타는 시체들이 모두 나의 시체들이었다고 해도 날 놀래킬 순 없어 갑자기 내 눈앞에서 툭 떨어지던 정강이뼈가 내 것이었다 해도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이봐요 네르발 씨, 오늘도 랍스터와 함께 해변으로 산책을 나오셨군요? 아뇨 저는 네르발 씨와 함께 산책 중인 랍스터인데요 이봐요 랍스터 씨, 지금이 몇 시죠? 저는 시계가 없습니다 시계는 저급해요 아니 글쎄 궁금하지도 않은 시간을 자꾸 보여주지 뭡니까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결국 몸은 텅 비게 될 텐데 텅 빈 터널 같은 마음속으로 찬바람만 자꾸 불어올 텐데…… 깨고 나니 무너진 터널 밖이었다 해변에서 십 미터쯤 붕 떠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십 미터쯤 붕 떠서 바라보자 현실은 꿈이 되었고 그날 만삼천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조니 미첼의 앨범<Blue>의 커버 색깔이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구름은 올려다보면 좋지만 내려다보면 기절하죠 바다 위 구름의 바다 나는 구름 속을 헤맨다 구름 속을 헤매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지금 드는 생각의 이착륙을 위한 긴 활주로가 필요해 여전히 같은 꿈속이었다 나는 어느덧 빛으로 가득한 그리스식 회랑에 당도해 있었다 새하얗고 튼튼한 기둥 일렬로 늘어선 기둥은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조금 기만적이고 어차피 깨고 나면 다 꿈이다 깨지 않는 꿈을 꿀 순 없을까 쯧쯧쯧, 한심한 자여— 죽은 후의 일은 궁리치 말고 태어나기 전에 그대가 어디 있었는지나 궁리해보거라 하고 피타고라스가 말했다 꿈 깨, 라는 말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게 긴긴 꿈에서 깨어나려는 노력 사는 일이 앞뒤가 막막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네 생은 앞뒤가 모두 뚫려 있구나 온몸에 힘을 주면 환생이고 온몸에 힘을 빼면 해탈이라는 생각에 잠시 힘을 빼고 한가로이 구름 위에 누워 있었는데 바야흐로 머릿속에 무한이 해방되었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고 어느새 다시 꿈속이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긴 회랑을 끝도 없이 걷고 있었다
황유원 시인 / 사슴 머리 여인숙에서* 오늘 아침 가슴에 한쪽 손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사슴 뛰는 소리 들려온다면 그건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삶을 향해 마구 돌진하고 싶다는 뜻이고 삶의 푸른 풀을 마구 뜯어대고 싶다는 뜻인데 그렇게 사슴 다 뛰쳐나가버리고 나면 마침내 홀로 남겨진 텅 빈 가슴속 고요 그 고요의 한복판에서 오늘은 문득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키스 재럿, 게리 피콕, 폴 모션의 앨범 〈At the Deer Head Inn>.
황유원 시인 / 인벤션
아주 깊은 기타 한 소절 정성 들여 친 후 거기 고립되기 좋은 밤이다 그 속에 밤새 눈이 내리게 한 후 철저히 나 혼자 되어 밤새 눈 내리는 소리나 듣게 하기 좋은 밤 거기 어울리는 건 망가져 땔감이 된 클래식 기타 타들어 가는 소리 불길에 공중이 녹아들어 열차처럼 기이-ㄹ게 휘어지는 소리밖에 없고 거기 낡은 양은 냄비 하나 올려놓고 방금 퍼 온 새하얀 눈 한 웅큼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나의 깊은 침묵을 얹기 좋은 밤이다 고립은 참 안 좋은 말이고 안타깝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때때로 필요한 건 고립이어서 고립과 짝이 되어 이렇게도 한밤 지새워 볼 일인데 창밖으로 눈으로 만든 양 떼들이 온다 사람과 하나도 안 똑같은 눈사람이 눈과 끝없이 하나 되어 가는 밤 숨죽인 채 발견되는 메모 같은 것 그 메모의 여백 같은 눈송이들이 한 줄 두 줄 울다 한 장 두 장 울기도 아예(상), (하)권으로 울려 버리기도 하는 밤 고립되지 않았으면 낼 수 없었을 소리 오로지 마음만을 반영하는 악기의 한 소절이 두꺼운 고서(古書) 한 권의 냄새로 깊어져 방 안 가득 퍼졌다가 조금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무슨 빛이나 소금처럼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다 한 번쯤 혼자 조용히 죽어 보기 좋은 밤 나는 구체적인 사실관계들로부터 몰래, 빠져나가 본다
-시작. 2014, 겨울호
황유원 시인 / 새처럼 우는 성(聖)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
내가 다가갈 때마다 푸드득 새들이 도망갔다 참새 비둘기 까치 다 나를 피했다 있는 힘을 다해 두루미 청둥오리 수리부엉이 훨훨 훨훨 훌훌 황망한 어궤조산(魚潰鳥散) 성 프란체스코여 그대 새의 음성 투명한 예각들 부서져내린다 돌을 쪼아 조각내듯 그러나 돌멩이 하나 상처 입히지 않고 돌 틈으로 꽃 몇 송이 밀어내는 힘으로 산산조각나는 공중 번개처럼 번개가 지나가고 난 뒤의 말짱한 하늘 같은 것들 남겨두고서 공중분해되는 새들 나무 속에 숨어서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처럼 부서지는 문자들의 빛나는 꼭짓점 형태 없는 소리들에게 거룩한 이름을 새들의 자세 새들의 종종걸음 새들이 거는 전화 마이크만한 새들이 떨어뜨리는 노래 군함새 저어새 해오라기 얼마간 비축해둔 힘으로 훨훨 훌훌 훨훨 겨자를 잔뜩 친 새 날개 스시 식초를 잔뜩 친 새 성대 냉면 푸드덕 파다닥 자유를 찾은 것처럼 곧 도살당할 것처럼 소쩍새 마도요 수리부엉이 귓구멍을 두들겨패는 성질머리 불현듯 시작돼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꾀꼬리 찌르레기 섬휘파람새 내리막길에서 손을 놓은 자전거의 속도 큰 날개 휘저어 춤을 추는 것처럼 다들 모여 어서 춤구경이나 하라는 것처럼 새들이 도망 갔다 도망 갔다 도망갔고 도망갔다 도망 갔으나 끝내 도망가지지 않는 잡새들 훌훌 훨훨 훨훨
황유원 시인 / 향
향이 타는 영상 거꾸로 돌리면 모든 연기는 향에게로 수렴되고
향은 연기를 먹고 조금씩 비를 맞고 자라나는 줄기처럼 조금씩 자라나고
이윽고 연기 모두 사라질 때 하나의 온전한 향만이 거기 남는다 붉은 입술처럼 뜨겁지도 사방에 재를 날리지도 않는 고요한 단 하나의 향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영상을 거꾸로 돌린 것에 불과해 당신이 영상을 보며 감탄하는 동안 당신의 표정이 점점 밝아오는 동안 재는 다 바람에 날려갔고
눈앞에는 이미 향도 재도 없어 한때 향이 놓여 있었고 재가 어질러져 있던
오로지 고요하고 수평한 테이블뿐
—《모:든 시》2017년 가을(창간호)
황유원 시인 / 검고 맑은 잠
창문을 열어놓은 채 홀로 물이나 한잔 따라 마시고 있을 때 그는 꼭 화선지에 칠해진 검은 밤 같다
벼루에 찬물 따르고 먹을 갈면 거기서 풀려나온 새까만 밤이 물속에 고이고
이 밤이 벼루에서 나온 것인지 먹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벼루에 먹을 갈던 손의 움직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물속에 고인 밤은 확실히 깊고 고요하여
그 밤을 묻힌 붓은 이미 붓을 초과하는 무엇이고 그 붓 지나간 자린 모조리 한밤중 텅 빈 골목이 되어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
차고 맑은 바람 스민 글자들 정서해 종이의 온몸에 한기가 들게 만든다 이 차고 맑은 밤이 종이 위로 옮겨가는 만큼 자신의 잠도 차고 맑아질 줄로 믿으며
그는 자신의 밤이 몇 개의 검고 맑은 글자로 고여 계절 속에 서서히 말라가는 걸 본다
문득 잠에서 깨 바라보면 모든 게 예외 없이 말라가고 있고
불을 꺼놓고 잠들었는데도 밤은 또 이토록 생생하고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