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성희 시인 / 아버지의 숲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3. 08:00
한성희 시인 / 아버지의 숲

한성희 시인 / 아버지의 숲

 

1

숲으로 불러 모은 몇 마리 떠돌이새에게

나무가 심장을 꺼내 직립의 생애를 들려준다

 

2

하얗게 흩날리는 대설을 껴안고

비탈에서 나무들 수직으로 굳어있다

숲을 떠난 꽃 때문만은 아닌 듯

짐승의 발자국은 산을 꿇어앉힌 채

봉분을 지키고 있다

 

3

몸을 움츠려 바람과 섞이고

눈보라에 두개골을 내밀던 나무들

은박을 입힌 설산처럼 숲의 나무들은

아버지의 자세를 물려받았다

 

4

벌어진 틈새를 닫는다

저 나무들,

흰 줄기 울음을 가지마다 가두고

아버지의 유년에 매여 있다

가난할수록 적막했을 그때의 저녁처럼

나이테에 새긴 눈물의 나이를 지난다

 

5

죽은 목숨으로 벌어진 창

나는 차가운 흐느낌에 저녁을 먹고

유적 같은 숲길에서

딱딱하게 굳은 뼈를 만져본다

바람의 영토처럼 뼈를 잠근 채 너무 멀리

아버지를 지나간다

 

6

수직의 혈관을 돌아 나뭇가지마다 빛나는

은빛 시간

푸른숲우체국 앞에서 봉함엽서를 들고

이름 모를 새들을 불러 모은다 느릿느릿

아버지가 돌아온다 기억의 바퀴살로

 

7

찬란한 직립은 아버지의 척추,

그때처럼 푸른 잎맥으로 아침이 찾아오고

다시 돌아오는 나무의 여백으로

아버지의 숲 가까이

그대가 남긴 심장을 나무 밑에 파묻는다

 

8

내 비루한 척추는 직립의 나무 밑에 있다

 

-(열린시학) 2015년 여름호

 

 


 

 

한성희 시인 / 뜬 숟가락

 

 

노인복지요양원 휠체어에 웅크린

오래된 자물통 입이

숟가락을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다

반쯤 벌어진 입술 속으로

애써 숟가락을 들이미는 사람

의자에 앉은 또 한 사람은

막무가내 허방을 뱉어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열심히 씹어서

입안에 가득 넣어 주고는

미음 그릇 곁에서 흔들리는 저물녘

저 검은 입속으로

더 떠 넣을 수 있는 것이

도무지 없을 것 같아

단호한 입가를 맴도는

허공의 숟가락질

어떤 허기가,

지금까지 먹인 밥보다 강건한 것일까

 

기울어진 햇살만으로도

이승의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니

허공에 뜬 숟가락

 

 


 

 

한성희 시인 / 끈질기게 웅크린

 

 

물길 끊겨 뱃가죽 훤히 드러난 동강의 자갈 바닥

씨암탉만 한 돌멩이 하나가 막 산란하고 있다

휘어진 등으로 무수히 내리꽂히는 햇살을 받아내는

반질반질한 등어리, 슬며시 들춰본다

구석으로 몰린 물구덩이에서 파닥거리는

여남은 마리 물고기와 개구리들

단단한 돌멩이 하나가 날개와 지느러미를 접고

뙤약볕 아래서 강을 품고 있다

 

수천 길 직립의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수만 갈래의 물길에 몸 뒤집다가

거친 물살에 몸 낮추고

강바닥이 훤해지기를 기다렸다니

제 체온으로 강의 명줄을 잇고 있다니

마른 강바닥에 끈질기게 웅크린 돌을

함부로 들춰볼 일, 아니다

 

둥근 등이 단호하게 땡볕을 튕겨내고 있다

 

 


 

 

한성희 시인 / 할복장(割腹場)*

 

 

칼바람이 빙판 개울을 긁으며 들어선다

칼끝에 부딪힌 햇살 한줄기 튕겨 나가며

통통한 물고기 배를 스윽 지난다

한 번의 칼질에 와르르 쏟아지는 겨울 바다

핏빛 파도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출렁거린다

 

더운 입김 훅훅 뿜어대는 방수복차림의 인부들

코를 틀어막은 채

가끔 창자를 새들에게 던진다

처절한 생존의 시그널을 알리는 듯

갈매기 떼 끼룩거리며

생득(生得)의 조문에 열중한다

 

피 묻은 얼음판 부리로 쪼아

종일 핏물이 물길을 트는 할복장

쉽게 도려낼 수 없는

뱃속의 울음을 송두리째 꺼내 놓고서야

그해 겨울이 빠져나가는데

 

바다의 뱃가죽을 들쑤시며 터뜨리는 창고 지붕에

눈 매서운 갈매기 한 마리 외다리로 서 있다

 

* 물고기의 배를 따는 곳

 

 


 

 

한성희 시인 / 상처를 따라 걷다

 

 

축축한 마음으로 날이 저물었다

몇 년의 투병과 가벼운 몸짓 주름들이 빛났다

대숲은 그때마다 흔들렸고 무언가 쏟아졌다

 

그녀는 밤새도록 통증의 그림자를 끌어당겼다

빈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얼굴들

눈동자에 닿은 풍경은 죽은 입이 되었다

 

창문을 닫고 있어도 바람이 닿았다

대숲의 출렁거림인지 무언가 흰죽에 닿은 듯

입술에서 한 줄기 뿌리를 건져 올렸다

 

멀리서 새잎이 돋아나려는지

몇 개의 알약들이 경계에서 벗어났다

 

길을 걷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는 깊어지고

스스로 제 그림자를 가두었다

그때부터 눈물은 점점 무거워졌다

 

누군가 할 말을 대신하듯

사람이 없는 집에도 풀이 자랐고

바람이 불고 달빛이 있었다

 

달빛이 닿은 길은 내리막이었지만

뻐마디 마디 삶에게는

아플 때가 가장 살아있는 몸이었다

 

하나의 언약처럼 상처를 따라 걸었다

아득한 것들이 흔들렸다 우리는

소리 없이 한 여자의 기억에 도착해 있었다

 

 


 

 

한성희 시인 / 허공의 입

 

 

수천의 입이 달린 콘크리트 빌딩숲

한 사내가사지를 콘크리트 벽에 꽂고

몽상의 채밀을 하고 있다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숨 가빠지는

도시의 벼랑을 찾아

새벽부터 콘크리트 절벽에 붙어 잉잉거리는

허공의 입

 

처음부터 밧줄에 입이 달리지는 않았다

 

현장의 입들이 외국인근로자에 봉쇄되고부터

색색의 입들은 페인트 통을 물고

재개발의 석청을 따라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늘을 탄다

 

입술이 좌우로 흔들리자 콘크리트 숲이 술렁댄다

오후의 이십오 층 벼랑에 활짝 핀 꽃입

울긋불긋 입술에 꽃가루 잔뜩 묻히며

허공에서 그늘의 젖을 빨고 있다

 

사내는 일당 칠만 원치 화수분을 채밀하고 나서야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로프에 묶고

주르륵 단단한 꽃을 내려선다

 

한나절 팽팽하던 밥줄이 그늘에서 몸을 푼다

 

 


 

 

한성희 시인 / 그날 심장의 연대기

 

 

멀어지지 않으려고 오래된 숲길을 맨발로 걷는다

붉은 물보라 치는 저녁강을 노을처럼 밟는다

 

내 얼굴을 푸른 핏줄기에 파묻고 실눈을 뜬다

시커먼 허파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견딘다

별자리처럼 너무 덮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구름을 이해하고 빗방울을 알몸으로 맞는다

 

나는 네가 흘린 땀방울로 목을 축이고

숲처럼 몸을 닦는다 마음보다 앞서서

네 몸을 나에게 통째로 내민다

수십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별이라 부르기엔 너무 뜨거운 심장

극지의 얼음이 서서히 녹고 있지만 무관하게

내가 죽어서도 너는 돌고 울 것이다

 

나는 너로서 너는 나로서 우주에 안긴다

너이기에 나를 던져버릴 수 있어서 운명이 따른다

망설이듯 너의 불규칙한 몸짓은 사랑의 비명이다

하나뿐인 죽음에서 너를 지구라 부르지 못한다

네 심장 소리가 더 가까이 친근하게 들린다

너에게 차가운 심장을 돌려준다

파고든다 파묻힌다 너를 깨우듯

 

이제야 엄마를 실컷 껴안아 보는구나!

 

 


 

한성희 시인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09년 《시평》으로 등단.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시집 『푸른숲우체국장』 『나는 당신 몸에 숨는다』. 2016년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현재 『포엠포엠』 작가회 회장, 문학마루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