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서 시인 / 바닥의 습관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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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서 시인 / 바닥의 습관
바닥만 보고 걷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발끝으로 허공을 톡톡 차고 걷다 보면 뒤꿈치까지 따라서 구름을 툭툭 찬다. 그러니까 발이 나를 가운데 두고 자기들끼리 밀고 당기는 동안 나는 앞으로 간다.
뒷발이 발끝으로 미는 동안 발꿈치는 내리막이다. 내 몸에는 그렇게 내리막과 오르막이 사이좋게 살고 있다. 내 몸속에 기거하는 이 오르막과 내리막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오래된 내 구두코가 뭉개지고 바람 소리 들려왔다.
구두 끝은 발톱처럼 둥글 뭉툭하다. 무엇 하나 아프게 발로 차 본 적 없다. 어쩌면 구두 끝이 뭉툭한 게 그래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몸은 여전히 오르막과 내리막이다. 오르막길에서도 난 여전히 바닥만 보고 걷는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내 안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서로를 부드럽게 밀어주기도 한다. 때론 걸음을 멈추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내 얼굴을 보고 웃는다. 비로소 내가 온몸으로 걷는다. 집이 기까워질수록 담장 없는 골목 아래의 낮은 집들, 손바닥만 한 마당을 품은 집들의 살림살이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다 보인다. 멀리 도심의 불빛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골목길은 강가의 잔 물살처럼 내 몸에 닿는다. 가로등 불빛은 커다란 물방울처럼 맺혀 집들의 따뜻한 창을 바라본다.
살아가는 일이란 게 생각해 보면 눈물 나게 별거 아니다.
낡은 신발 한 켤레 불빛에 걸어 두는 일이거나 식구들의 신발 사이에 내 신발을 나란히 벗어 두는 일이다.
신발이 나와 등 돌리고 잠드는 동안 내 오르막과 내리막을 잠시 쉬게 하는 일이다.
신윤서 시인 / 달의 언저리
언덕에 기어오른 계집애들이 달아올라 발을 구르며 노랠 부를 때 춤은 38°C의 체온
그때 깨어나는 세상은 모퉁이였으나 정점으로 서지
어둠은 실금이 가고 균열로 들끓고 하늘을 다투던 계집애들에게 검댕을 묻히네 세상에, 춤이 달을 끌어다 아득한 천공에 부려놓기도 한다네
애드벌룬 같은 계집애들, 검은데 붉은 실금들이 치마를 부풀리고 날개를 가진 새가 태어나고
저 계집애들은 가슴 언저리에 귀가 달렸나봐 하나같이 봉긋해져서
지상의 모든 언덕이 밤의 무대를 펼치고 달의 연극을 올릴 때
아라비아 숫자를 세며, 조그만 계집애들이 태어나지 달은 계집애들의 우주에 속한 별
산파가 되고 유모가 되고 드레스를 끄는 신부의 뒤를 따르다 첫날밤의 커튼 뒤에 숨어
불이 꺼진 달의 방 창문을 두드리다가 우리가 소녀라고 부르던 계집애를 만나러 산책을 간다네
수국이 가슴을 움켜쥐고 어둠과 부풀고 있다
-계간 《POSITION》 2023년 여름호
신윤서 시인 / 베르나르 브네의 기억
오랫동안 깊이 잠들지 못했다. 저녁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예감처럼 어둠은 또 밀려와 창문을 에워쌌다. 당신이 불빛 아래서 그 환한 얼굴을 드는 순간, 나의 한 생이 온전히 기억되었다. 꿈속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찬 기운에 잠이 깨면 새벽 네 시, 혹은 다섯 시. 그때 당신은 잠시, 내 눈빛을 들여다보다가 분노한 헤라클레스의 가슴을 발견했거나 시바 여왕의 야성적 눈썹을 끌어와 덮어 주고는 잘 자라는 쓸쓸한 말 한마디 흘려 놓았다.
재즈보컬의 음색을 흘리는 여자가 온종일 마이크를 붙들고 예수를 찬양했다. 찬송가의 배경음이 광장을 적시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흔들며 리듬을 타는 여자의 행색이 시야에 들어왔다. 목소리는 호소력이 짙었다. 낮게 기도문을 읊조리다가 서서히 하늘까지 치솟는 여자의 가락에 맞추어 찬바람은 낙엽을 이끌고 일제히 회오리쳤다. 광신도처럼 분수대의 물줄기들이 세찬 박수갈채를 뿜어 올렸다. 비둘기 떼 콘크리트 바닥에 복음을 새겨 넣는 저물녘, 봉지 터진 알사탕처럼 굴러왔다 바삐 사라지는 사람들 속에서 허스키한 여자의 노래는 지치지 않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 바람의 찬가, 웅크려 누운 것들의 등을 토닥이며 오랫동안 광장에 머물러 있었다.
늘 깊은 잠이 그리웠다. 자고 나면 몇 겁의 허물이 벗겨지곤 했다. 정오의 햇살을 따돌리고 아주 은밀한 곳에 주차된 주인 모를 당신과 내가 하나의 방으로 스며들었을때, 나의 전 생애가 당신의 유전자 속에 낱낱이 기록되었다.
신윤서 시인 / 밤의 바퀴 방바닥의 햇볕을 몇 번 접었는데 창문이 어두워졌다 그 어떤 은유보다 절박한 우묵한 허리에 쌀을 씻어 안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을 조금 더 길게 잡아당겨 내일에 이어놓는 것 삿된 구름을 쫓아낸 것이 정말 창문이었나 새가 날아간 구멍으로 쏟아진 것이 어둠이었나 적막은 손수건으로 쓰기엔 너무 철이 없어 검붉어지는 강물을 따라 오랜 밤을 걸었다 어둠은 둥글고 날카롭다는 것, 저물어 가는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문 발바닥이 피도 없이 붉어지는 일임을 알기에 어딘가에 속도를 등글게 말고 머리를 날개 속에 밀어 넣는 새처럼 나는 가는 나뭇가지를 휘던 새의 무게로 적멸을 네 등분한 창문과 마주하고 있었다 밤의 바퀴에서
-포지션 2023 여름호
신윤서 시인 / 브라우티건풍으로
선풍기의 날개 사이로 부는 바람은, 내 이름이다. 모기장을 둘러친 침대에 기대어 『워터 멜론 슈가에서』를 읽는다.
약속한 날들이 지나가 버리고, 나는 결코 책 제목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몹시 쓸쓸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들판에 망연히 앉아 망초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
강을 지날 때마다 높이 튀어 오르는 숭어의 은빛 비늘이거나, 빼곡히 적힌 수첩의 전화번호 따위로 우리의 관계가 표현되었으니, 그것은 참 슬픈 일이라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유자나무 한 그루가 칠 년째 열매를 매달지 않은 이유는 뻔하지 않겠는가.
선풍기의 날개 사이로 부는 바람이 나를 한 페이지 넘긴다. 오래전 쉴 새 없이 내게로 날아들었던 그대들의 열렬한 편지들이 내 삶을 두껍게 하여 그동안 아무도 나를 즐겁게 읽어 주지 않았다. 가끔은 아침을 거르고, 벌에 쏘인 듯 다급하게 지평선으로 가 버렸다. 어쩌면 당신은 망초 속에서 늘 울고 있을지도 몰라서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로 짙은 안개가 내려앉는다.
경부선 첫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끝내 돌아서질 못하는, 여행 가방처럼 나는 무겁다. 긴 치맛자락처럼 책의 내용에 굵게 밑줄을 그으며, 서성이고 망설이다 끝내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이름이 떠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선풍기 바람이 불어오는 모기장이 쳐진 침대 위에 누운 나의 반쯤 드러난 가슴을 열고 들어와 나를 달콤하게 읽어 주기를 바란다. 당신이 나의 주인공이 되어 들판에 망연히 앉아 망초꽃이 흔들리는 것을 읽어 줬으면 좋겠다
신윤서 시인 / 빵 먹는 저녁
현해탄을 건너 온 시부야상의 머릿결에는 아직도 바닷바람이 분다. 찰랑찰랑 단발머리 사이로 물살이 인다. 오늘 점심 급식에 크로와상이 나왔어. 딸애는 고조된 목소리로 알려 준다. 오, 크로와상! 엄마, 시부야상도 크로와상을 좋아할까? 깔깔깔 웃음 터트리는 딸애가 히라가나로 쓰인 문장을 읽는다. 이 숲에는 어린 고양이들이 많아. 쉿! 조용히 해. 동그란 눈알이 반짝, 풀섶에서 고개를 든다. 아, 네코짱! 너의 목덜미는 참으로 우아하구나. 희고 고운 목덜미를 치켜들어 허공을 바라보는 사이, 찰칵, 어린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마음에 들이기로 한다. 너는 내 사람이야. 내 여자야. 그렇게 말해 준 남자가 그녀에겐 있을까.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남자를 하나 찾아 현해탄을 건너 왔을까. 콩콩콩 잰 걸음으로 달려와 내게 우산을 챙겨주는 시부야상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서 봄비가 내리고 있다. 나뭇가지처럼 사방으로 귀를 열어 놓는 그녀가 환한 피부로 웃는다. 일요일 아침엔 커피를 마신 후 해운대엘 가서 다시 커피를 마시고 버스를 타고 집엘 돌아와 또 커피를 마셨어요. 까르르. 해운대 바다를 좋아한다는 시부야 마사에가 북경으로 떠난 한국 남자에게 건넨 이-메일 편지함엔 편지가 도착해 있을까. 만화 책 속에서 방금 뛰쳐나온 소녀처럼 그녀는 쫑긋거리는 귀를 열어 설레임 쪽으로 주파수를 맞춘다. 작고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반짝, 맞는다. 깔깔깔. 그녀의 웃음소리가 구슬치기를 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크로와상을 뜯는 저녁이다.
신윤서 시인 / 저녁의 음악 -And I'll be remembering You 그리고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게요.*
이 하루는 낡고 거친 시내버스로 흘러와 저녁의 문 가까이 닿았다.
합판을 덧댄 손수레가 재래시장을 밀고 다닌다. 좌판에 드러누워 불빛을 쬐던 문어들이 산호초 닮은 아름다운 빨판을 드러낸 채, 시장 여자들 쌈박질 소리를 듣고 있다. 귀가 따가운지, 꼼지락거리며 몸을 조율한 후, 무수한 코드를 눌러대며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흡착력 강한 빨판이 목청껏 불어제끼는 트럼본 소리, 섹소폰 소리, 좌판을 두드려 대기 시작하는 소나기 지나가는 소리,
파장 가까운 시장이 때 아닌 소리들로 소란하다. 머리채를 잡아 뜯던 여자들이 시장바닥을 구르고 있다. 어디든 가서 쓸쓸한 의자에 앉고 싶다. 소주잔을 기울이는 저녁이 화통을 집어 삼킨 듯 뿜어대는 연주를 듣고 있다. 소리들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외눈처럼 박혀있는 문어의 다부진 입이, 어둠의 눈을 한껏 노려본다. 흠칫, 저녁이 놀란다. 지친 여자들이 내는 거친 숨소리, 둥근 빨판들이 소릴 지르며 싱싱하게 꽃핀다. 앉아서 생각에 잠길 의자가 없다. 캄캄한 마음. 힘든 싸움. 저녁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의 막막한 등에 기대어, 그러나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 난장판의 한가운데서.
*And I'll be remembering You, 그리고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Die Resonanz Stanonczi 의 재즈 연주곡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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