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문영하 시인 / 꽃 따러 간다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5. 08:00
문영하 시인 / 꽃 따러 간다

문영하 시인 / 꽃 따러 간다

 

 

몽골초원의 여자들은

뒷간에 갈 때 ‘꽃 따러 간다고 한다’

천상의 화원에다 볼일을 보고

풀꽃으로 뒤처리를 하는가 보다

 

뒷간을 차고 다니는 우리 아기는

이틀에 한 번씩

거룩한 큰 꽃을 딴다

 

어미는 조향사의 표정으로

흠흠, 향과 색이 좋다며

물외꽃 같은 그 꽃을

맨손으로 기꺼이 받아낸다

 

초원의 여자들은 천지사방 깔려있는

들꽃 위에다 꽃을 낳으니

꺾어도 꺾어도 살아나는

꽃의 부활이다

 

대지를 향해 온 힘을 모아 오롯이 피우는 꽃

지모신이 보냈을까

솜다리, 절굿대, 분홍 술패랭이가 와서

그 순한 꽃을 가만히 받아낸다

 

-시집 『소리의 눈』 미네르바, 2023

 

 


 

 

문영하 시인 / 밥

 

 

어미는 밥이다

윤기 자르르한 고봉밥 고슬고슬 담아내던

화수분 같은 손끝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수풀을 헤치고 언 땅을 녹이며

꽃잎 같은 보드라운 입에 먹이 날라 물리었다

 

배꼽에 자루 달고 숨차게 벌판을 달려온 캥거루

 

탯줄 릴레이

질긴 생명줄이 날래게 달린다

 

새벽별 이고 나와 해종일 뛰다가

이제 바통을 넘기고 트랙 밖으로 나온 그녀

힘은 모두 소진되고 텅 빈 거죽으로 앉았다가 벌떡

일어선다

 

밥 묵었나, 밥을 묵어야제

밥을 묵고 가야제

 

원초의 소리가 자장가의 후렴처럼 끝없이 반복된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에서

뜨거운 밥 냄새가 솟아오른다

 

-시집 <청동거울>에서

 

 


 

 

문영하 시인 / 오래된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마을에도 은가루 같은 눈이 내리고 내려

나는 샤갈의 여인이 되어 하늘을 난다

 

눈 오는 벌판

살가운 얼굴들이 오롯이 모여 있는

자작나무 연기 올리며 주술에 걸린 마을

 

다듬이 소리가

하얀 옷을 입고 영롱한 걸음으로 강 건너 마실을

다녀오는 밤

 

지상을 떠난 영혼들이

박주가리 솜털처럼 가만가만 내려와

정다운 이들의 창가에 앉는다

 

나는 꽁지 빠진 흰집칼새

물컹한 그리움을 한 점, 한 점, 점액으로 뱉어내어

바람벽에 걸어둘 움집 한 채 짓는다

 

내 속에 白色 정령이 들어오던 날

 

-시집 『오래된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에서

 

 


 

 

문영하 시인 / 자장매(慈藏梅)*

 

 

늦추위 잔가시로 남은 아침

통도사 마당이 환하다

 

홀아비 종수아재, 간질로 이세상 돌아서더니

발걸음 휙 돌려

영각 앞에 다시와 어정거리다가

휘어진 팔 바르르 치켜들고 감았던 눈을 뜨며

핏빛 머금은 꽃봉을 알알이 매단다

 

메꽃 같은 아내 친정으로 내몰고 오솔한 암자에

몸을 걸치더니

깃털 빠진 장끼처럼

그리움 짓이겨 청보리밭 귀퉁이에 흙집 짓더니

 

그 연(緣) 차마 못 잊어 서릿발 헤치고 지상으로 올라와

힘껏 뿜어 올리는 붉은 그늘

가슴에 쟁인 말 울걱울걱 쏟아내며

다다귀다다귀 서러운 영혼을 풀어내고 있다

 

타는 듯 신열이 온몸으로 번진 아재

분홍장삼 걸치고 구천을 넘나들며

해마다 여기 와 너풀너풀 영원을 덜어내고 있다

 

*자장율사를 기려 심었다는 양산 통도사 수령 350년의 홍매.

 

 


 

 

문영하 시인 / 고리에 걸린 바나나

 

 

똑같은 힘일 때는 좀 더 오래 버티는 놈이 이기는

법이라고

아버지 늘 말씀하셨지

 

바나나를 길게 보관하기 위해선 고리에 걸어두라고

나무에 달린 줄 알고 천천히 익어간다고

 

일명 바나나 속이기인데

우리는 바나나를 속였고 아버지는 세상에 속아 허공을

움켜쥐곤 했다

 

아버지의 등에 업힌 오남매,

그의 마른 등에서는 늘 젖은 휘파람 소리가 났다

 

바나나의 몸에 거뭇거뭇 검버섯이 핀다

고리 끝에 매달린 열매 죽을힘으로 버티다 아득히 잠 속으로 빠져든다

 

움켜쥔 아버지 손이 아래로 떨어진다

헐렁한 허리춤 사이로 남은 시간이 빠져나간다.

 

바나나 껍질 위에서 스치듯 미끄러지는 아버지

옷걸이에 걸린 낡은 양복도 풀썩 주저앉는다

 

허공에 영혼을 매달고 지상의 끝에 선 아버지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시집《오래된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2020, 미네르바

 

 


 

 

문영하 시인 / 퇴직 일지1

ㅡ 단풍나무 교실

 

 

퇴직 후 10년, 아직도 교실 풍경이 나를 따라다닌다.

1학년을 맡은 어느 해 5월, 교육청에서 장학지도를 나왔다.

벨이 울리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자리 하나가 비었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찾아도 아이는 없다.

벌집 쑤셔 놓은 듯 교실은 와글와글 난장판.

 

그때 창문 밖 단풍나무 가지에 비둘기처럼 앉은 아이가

“여기요. 여기서도 선생님이 잘 보여요”

휴, 가슴을 쓸어내렸다.

 

교실에서 교실을 밀고 나간

아이는

담임이 보이는 단풍나무까지가 교실이었다

 

거침없이 시공간을 끌고 다니던 아이는

장애물 경기 같은 이 세상을

어떤 이야기로 건너고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문영하 시인

1951년 경남 남해 출생. 2015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청동거울』 『오래된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소리의 눈』. 미네르바 시예술 아카데미상 수상. 서울시 초등교사 32년 근무, 명예퇴임.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