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영미 시인 / 헤아려보는 파문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5. 08:00
한영미 시인 / 헤아려보는 파문

한영미 시인 / 헤아려보는 파문

 

 

​​미루나무 물그림자 어른거리는 연못에

돌을 던진다

 

​파문이 일렁일지, 퍼질지

음 소거하고 상상하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퉁명이

제법 옴팡지다는 걸 알게 된다

찔끔 구름이 비쳤으므로

 

​마음은 부유물이 많아서 탁할 때가 있다

어수선하게 떠 있던 자존심도

가라앉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나무는 가지 하나 늘여뜨려

그 속이 안녕한가,

동심원을 모으고 있다

 

​던져진 돌의 파문이 누군가에게 밀려갈 때

나도 그 주름일 수 있겠구나, 라는

변명에도 구차한 무게가 있다니

 

​공연한 구름이어서

수면 아래 속내에 영향을 미친다

서식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자리 잡아주는 일이라고

 

​비견할 만한 또 다른 파문을

내 안에 둔다

흔들려 깨진 어딘가에 누가 있다

 

​-문예지 <시산맥> 2022년 가을호

 

 


 

 

한영미 시인 / 객공(客工)

 

 

재봉틀 소리가 창신동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담장이 막다른 대문을 맞춰 다리면

원단 묶음 실은 오토바이가 주름을 잡았다

스팀다리미 수증기 속으로

희망도 샘플이 되던 겨울

 

어린 객공은 노루발을 구르다 손끝에 한 점

핏방울을 틔우곤 했다 짧은 비명이

짓무른 패턴에 스미면,

엉킨 실은 부풀어 오른 손가락 감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었다

이제 그 슬픔도 완제품이다

 

붕대처럼 동여맨 구름

 

자수(刺繡)의 밤하늘은 그녀의 눈물을 진열한 쇼핑센터가 아닐까

화려하게 화려하게

너무나 눈이 부셔서

 

쪽가위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이따금 실밥처럼 잘려나가는 유성을 보았다

 

 


 

 

한영미 시인 / 드림캐처

 

 

무지개 한 톨 쪼아 먹고 있어야할 새의 깃털이

노점에서 행인들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

 

어쩌다 이 나라에까지 와서 나부끼는지

 

고리 안에 그물을 엮는 사내의 눈빛이

깃털처럼 불안하다

 

낯선 세계가 그어 놓은 경계처럼

모퉁이를 전전하는 보퉁이에는

떠나야만 했던 절박이 묻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생김새와 말투지만

진짜 깃털이라고 반복하는

그의 말이 믿겨질 만큼 쪼그려 앉아 있다

 

문득 그에게서

고국의 가족이 아프면

깃털꾸러미가 흔들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악몽을 걸러내면 몸도 가벼워진다는

그의 말을 몇 개 사가기로 했다

 

웃음으로 슬픔을 감출 수 있는 것은

먼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준 적 있다는 것,

 

그가 덤으로 알록달록한

구슬 하나를 더 채워준다

깃털은 어눌한 그의 미소처럼 하늘거렸다

 

오늘밤 새 한 마리가 내게 날아와

케케묵은 악몽 하나 물어가기를

 

- <시현실> 2021년 여름호

 

 


 

 

한영미 시인 / 소금 창고

 

 

 그가 유물留物로 서 있다 세상은 쉬지 않고 수차를 돌려야만 살아낼 수가 있었다고, 낡고 비루해진 몸뚱이 잊힌 그림자처럼 서 있다 녹아 흐르는 소금물처럼 시간과 함께 기억 속으로 사라진 염전의 풍경들, 고된 노동으로 새겨진 뼛속 통점들만이 몸 깊이 박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데, 긴 세월 땀에 절여져 소금기 밴 몸

쉽사리 바람에 내어주지도 허물어지지도 않는다

 

 들어온 바닷물 나지 못하는 갯골처럼 한번 고인 가난은 끝이 없었어라 바닥은 도

망칠 길도 없었어라

 

 맨몸으로 태어나 산전수전 가릴 것 없이 건너온 거친 세월, 이제는 갈대숲 무성한 이곳에* 소금창고로 남겨져 햇덧에 기대어 서 있다 햇살이 울컥, 그의 처진 어깨 위에 소금꽃으로 뿌려진다

 

*시흥 갯골 생태 공원

 

 


 

 

한영미 시인 / 안녕, 시빌라*

 

 

말들이 날아다니네

영원보다 중요한 것은 젊고 건강한 육신이나

후략의 말로 천형을 사네

 

스크린 도어가 열리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유령들

 

몸을 얻지 못한 말들이 날아가

여린 꽃 옆에 쪼그리고 앉아 빈손 내미네

 

허공에 눈물 뿌리네

 

알 수 없는 꽃들은 돌아볼 사이 없이 툭툭 지고

몸 빌려볼까

그들 곁을 오래 어른거리네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

끝내 아프거나 아픈 척하거나

아픈 것들은 파고들기 전에 소리도 없이

허물어지거나 닫히고,

 

상처 준 것들은 오히려 피해자 행세로

오래도록 살아남지

 

갈 곳을 잃었네

수천 년 바람에 실려 시공을 헤맸어도

사막처럼 내려앉을 곳 없이 황량해

 

몸을 얻지 못한 말들로 육신을 얻고자

오늘도 아픈 것들을 찾아 헤매네

 

죽여줘!죽여줘!

바람에 실려 다니는 말들이

허공에 떠 있네

 

* Sibylla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무녀

 

 


 

 

한영미 시인 / 소유

 

 

빈 항아리 하나 버려져 있다

 

그토록 오래

공들여 쌓았던 말들도

이제는 다 빠져나가고,

 

여기저기 닳고 깨져

바닥에 눌어붙은 바람만

공명으로 남아 있다

 

살고는 있으나

살지 않는 바람처럼,

 

한때의 풍요를

기억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살면서 어느 것 하나

머물렀다 떠나지 않는 것은 없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저마다 자신을 사랑했을 뿐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면

붙잡지도 말아야 한다고

 

 


 

 

한영미 시인 / 다른 날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구름 이야기

 

 

하나의 표지판을 가진 두 바다가 있었어요

 

절벽으로 막혀 있어 이스턴 비치는 파도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바다에요 그곳엔 카페가 통창의 눈으로 서 있었어요 벽면에는 바스키야의 그림을 닮은 낙서들이 걸려 있었고요 아무리 뒤섞인 마음도 잠시만 앉아 있으면 정적인 바다의 배경이 되곤 했어요

 

반대편엔 심해를 뒤엎어놓은 것처럼 파도가 드높은 버클랜드 비치가 있어요 소라껍질이 되어 가만히 귀를 열어두고 서 있으면 어느 순간 안에 가둬 둔 소리가 쏟아졌어요 가끔 그 시간이면 커다란 개와 산책 나온 노인이 손을 흔들어 주곤 했어요 짖지 않는 개는 황혼 내리덮인 주인 뒷모습을 닮았어요

 

바닷가 편의점에서 종일 알바를 하던 동양인 여자를 알게 되었어요 영어가 짧은 그녀의 말은 두 단어에서 끝나곤 했어요 하이, 땡큐! 그런데 유독 드높이 파도치던 날, 그녀가 무수한 말을 할 줄 안다는 걸 알았어요 보고 싶다와 가고 싶다는 말이 교차하는 동안 자폐를 앓고 있다던 아이 이름을 열 번쯤 되뇌였어요

 

이스턴 비치와 버클랜드 비치를 오가는 구름들이 있어요 한 자리에 오래 머물다 돌아서는 구름을, 다른 날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두 바다를 가진 하나의 표지판이 있었어요

 

-<시현실 여름호>

 

 


 

 

한영미 시인 / 쪽방촌 오르트 씨

 

 

 서녘의 거대한 빌딩 사이를 태양이 돌며 공놀이를 시작해요

 

 궤적이 붉은 속도를 따라가느라, 방들은 손가락 사이로 매달려요 얼음덩이 같은, 먼지덩이 같은 창문들이 궤도 밖으로 밀려나 배경으로 남아 있어요 골목의 감정은 매번 다르지만, 모서리를 깎은 계단은 어디서나 높은 곳을 향해 몰려들어요 가 닿지 못하는 체념이 전봇대에 걸쳐져 있어요 담장을 층층 올라가는 짓무른 이끼들,

 

 어제의 희망 속엔 비 내리는 날이 많았지만, 단지 악천후였다고 요약되는 막다른 길목에 서 있어요 바깥의 얼굴로 띠를 두른, 창문 없는 쪽방이 내겐 주소에요 경사면을 짚으면서도 나선의 사다리처럼 천천히 올라가는 거라고 믿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겐 쉽게도 여닫히는 벽은 절취선을 감춰둔 문이 분명해요

 

 간혹 눅눅한 침묵과 악다구니가 소행성처럼 스쳐 지나도 한 번 튕겨 나간 꿈은 되돌아오지 않았어요 더 이상 갈 곳 없는 종점, 이곳을 오르트 구름존이라고 불러요 빙그르 돌며 태양은 오늘도 마지막 공놀이를 하고 있어요 능선에 탁 내리쳐질 때마다 몰려든 어스름이 튀어 오르고, 부딪히고

 

 하지만 여긴, 너무나 멀어서 기억조차 희미한 외곽의 일이겠지요 이제 그만 나를 잊어도 괜찮아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한영미 시인

1968년 서울에서 출생, 2019년 《시산맥》을 통해 등단,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