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근 시인 / 우리의 소유권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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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근 시인 / 우리의 소유권
곱창집 구석자리 소주를 마시다 다 드러낸 속내를 젓가락으로 집는다 그래, 생은 간보다 가는 거야 양념장에 곱창 한 점 찍을 때마다 사연들이 흥건하다 말하면 뭣해 다 사는 얘긴데 잔이나 받으시오 비운 잔을 옆자리에 건넨다 리시버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하고 훔쳐보는 관심과 소리조차 지워버리며 저 만치 골목을 돌아가는 외인용병 둘이서 세상을 비웃고 있다 얼마나 많은 입술들이 닿았을까 이 술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앉았다 갔을까 이 의자 얼마나 많은 살점들이 지글거렸을까 이 불판 머지않아 비워줘야 할 자리 털고 일어나 포만의 시간을 삼킨 배 두드리며 여직 살아 있다고 어두운 바깥으로 몰려들 나간다 골목은 끝이 있어도 내 골목은 없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최병근 시인 / 그릇
쓸모는 밥상을 부른다 수저도 대기 전에 진즉부터 포만해져서 놓여 있는 그릇들
그릇된 자들은 입이 젤로 크다
여섯 살 적 할머니 흰 귀밑머리 아래서
큰 그릇 될 거여
배부를수록 그릇은 빈다
최병근 시인 / 모처럼
풍경소리 들으러 갔다 거기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와중에 누군가 대장간에라도 다녀왔는지 사천왕 작두 창칼이 춤추고 목이 잘린 말들
말들이 히힝 울었다 경마장이 아니었는데 재갈을 물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첩첩산중
결가부좌로 포박당한 부처가 유리안치 되었다
일곱 걸음만 걸을 수 있게 해다오 연꽃 위에서 이슬과 노는 개구리나 되게
누구의 명이던가 붉은 장삼을 두른 나무들이 대웅전 지붕 위에 단지한 손가락을 불쏘시개로 던져 불을 질렀다
발치 사하촌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났다 -계간 『문예연구』(2022년 전국계간문예지우수작품상 수상작)
최병근 시인 / 먼지
어둠의 그늘에서 잠자던,
뿌리도 없이 자라난 너는
어디서 왔을까
저 침묵은 어느 전생인가
현생은 찰나의 빛이라고
아침마다 눈을 뜬다
창틈으로 새어든 햇살로 바라본다
내 이름 새긴 먼지 하나
-시집, <먼지>(근간)에서
최병근 시인 / 대나무 수도승
오랜 기간 수도했다고 다 도승道僧은 아니다
짧은 도행道行에도 반질하고 곧게 길들여져 정정히 살아가는 수도자가 있다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 집 같은
최병근 시인 / 내 친구 이발사
빨강 파랑 흰색 물감 빙글빙글 돌아가는 삼색 등 아래 이발사라 부르지 말고 예술사라 부르라던 내 친구 의자에 앉은 모델 형체를 잠시 살피다 바리바리 깡으로 불사르는 예술혼 직감적인 선의 흐름을 따라가며 짱구인 사람도 평평한 구도를 잡아 깎는다 때론 세파에 탈색된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색조로 덧칠도 하고 침하고 더부룩한 면을 찾아 밝고 어둡게 명암을 살려 붓질을 한다 투블럭 기법이나 가르마 기법으로 별 초승달 등 다양한 문양을 새긴다 인접 작가 미용사의 하찮은 미소에 밀려 늘 가난한 조형예술사 내 친구
최병근 시인 / 문제들
마천루가 피뢰침에게 물었다 너, 내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음모들을 알아?
피뢰침이 대답했다 하늘의 음모는 알고 있지
마천루의 뿌리는 지하주차장 늘 지상보다 어둡다
모든 음모는 구름 위에 있고 지하주차장에 있다
지상을 살아가는 착한 영혼들은 그걸 모른다 마치 자신의 고향이 하늘인 걸 착각한 듯이 아니면 돌아갈 곳이 지하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체하는 듯
사막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최병근 시인 / 질주에 대한 편견
멈추어야 하는 지점에서 사고는 일어난다 골목에서의 사랑은 벚꽃 핀 봄날이 아니었다 어둠이 어떻게 세계를 어루만져 흰 토끼의 허황한 꿈을 완성할 수 있나 귀를 쫑긋 세우고 코를 열어 킁킁거리고 뛰어 봐야 거기서 거기 세계는 생각보다 넓어 머리통을 짓누른다 여우의 숲을 떠나 초원에 간들 토끼는 토끼 매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빨리 도주해도 날개의 속도를 이기지 못한다 날 수 없는 거북이는 차라리 돌이 되어 사막을 견딘다
-애지사화집 김정웅 외 {북극항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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