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영석 시인 / 믿음에 관하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5. 08:00
임영석 시인 / 믿음에 관하여

임영석 시인 / 믿음에 관하여

 

 

나무를 보니 나도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겠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있어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에

내 마음의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

눈과 비, 천둥과 번개를 말씀으로 삼아

내 마음이 너덜너덜 닳고 헤질 때까지

받아적고 받아적어 어떠한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침묵의 기도문 하나 허공에 세워야겠다

남들이 부질없다고 다 버린 똥, 오줌

향기롭게 달게 받아먹고 삼킬 수 있는 나무,

무엇을 소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나무,

누구에게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그런 나무의 믿음을 가져야겠다

하늘 아래 살면서 외롭고 고독할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싶을 때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에 그런 믿음을 가득 새겨야겠다

 

 


 

 

임영석 시인 / 노을

 

 

사과 같은 둥근해를 수평선에 걸어두고

 

파도가 철썩이면 붉은 해가 다 녹아서

 

뱃고동 소리에 그만 파도 속에 스며든다

 

《시조21>2023. 여름호

 

 


 

 

임영석 시인 / 달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는

저울이다

 

그 꿈의 무게가 무거우면 초승달이 뜨고

그 꿈의 무게가 가벼우면 보름달이 뜬다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려고

저녁마다 앞산에 뜬다

 

 


 

 

임영석 시인 / 세상

 

 

안 보이는 게 보이면

아름다운 세상이고

 

보이는 게 안 보이면

지옥 같은 세상이다

 

꽃들은 그 향기를 위해

온 몸을 다 바친다

 

꽃 속의 향기처럼

숨어 있는 수많은 말

 

감추고 감추어도

드러나는 어둠처럼

 

두 눈에 담지 않아도

담기는 게 꽃이다

 

-《시조21》 2023, 여름호

 

 


 

 

임영석 시인 / 어느 날 문득 나도

 

 

내 눈엔 저 하늘도 객이 머문 주막처럼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비바람 오고 가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슴에 품었을까

 

그래도 저 하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침마다 둥근 해를 손거울처럼 달아놓고

채송화 봉숭아꽃을 장독 뒤에 피운다

 

어느 날 문득 나도 하늘을 오른다면

꽃살문 창지(窓紙)에다 달빛이나 수놓으며

허기를 달래고 사는 너를 위로 하겠다

 

눈앞이 절벽이고 고독인 이 세상 삶,

두드려 만들어진 그릇도 녹이 스는데

내 어찌 푸른 청춘만 고집하며 살겠나

 

 


 

 

임영석 시인 / 큰물

 

 

온 마을을 다 삼키고 허기가 안 갔는지

범람의 물 수의를 코앞에 붙들고서

긴 혀의 속내를 그만 송곳처럼 드러낸다

 

죽창도 아니 들고 횃불도 아니 들고

작고 작은 빗방울이 큰 물을 이뤘으니

허공에 가득한 꿈을 만천하에 펴 보인다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말을 하겠느냐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뜻을 펴겠느냐

강물이 붉게 울 때는 세상이 다 슬픈 거다

 

삼백 리 강길 따라 억새꽃이 휘날려서

배고픈 내 어깨를 황혼으로 덮어주며

달빛을 흐드러지게 녹여 줬던 물 아닌가

 

이제는 참지 않고 신명 나게 살겠다며

천둥소리 그 탯줄을 단번에 잘라내며

물거품 두려워 않고 큰 세상을 향해 간다

 

짐승도 떼를 지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뼈 없는 몸이라고 귀한 줄 몰랐는데

큰물로 저리 흐르니 용이 따로 없구나

 

-《좋은시조》2022. 겨울호

 

 


 

 

임영석 시인 / 블랙박스, 또는 CCTV

 

 

이제는 어디서든 내가 나를 못 속인다

나보다 더 선명한 기억을 기억하는

문장의 마침표들이 눈을 뜨고 있어서다

 

꽃피는 봄이라고 문장을 써 놓아도

그 문장의 기억들은 눈물 없는 눈빛으로

당신의 붉은 가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정오의 뉴스에는 실종된 그 부부가

딸을 업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도 전한다

 

내 기억은 쓸모없이 감정만 담기지만

사실주의 철학으로 무장한 저 눈빛은

악필의 문장만 골라 마침표를 찍는다

 

 


 

임영석 시인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현대시조>로 등단, 시집 『이중 창문을 굳게 닫고』 『사랑엽서』 『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 놓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배경』 『고래 발자국』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시조집 <꽃불> 외 2권, 2012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2017년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등 수상.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2011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