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석 시인 / 믿음에 관하여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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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석 시인 / 믿음에 관하여
나무를 보니 나도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겠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있어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에 내 마음의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 눈과 비, 천둥과 번개를 말씀으로 삼아 내 마음이 너덜너덜 닳고 헤질 때까지 받아적고 받아적어 어떠한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침묵의 기도문 하나 허공에 세워야겠다 남들이 부질없다고 다 버린 똥, 오줌 향기롭게 달게 받아먹고 삼킬 수 있는 나무, 무엇을 소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나무, 누구에게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그런 나무의 믿음을 가져야겠다 하늘 아래 살면서 외롭고 고독할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싶을 때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에 그런 믿음을 가득 새겨야겠다
임영석 시인 / 노을
사과 같은 둥근해를 수평선에 걸어두고
파도가 철썩이면 붉은 해가 다 녹아서
뱃고동 소리에 그만 파도 속에 스며든다
《시조21>2023. 여름호
임영석 시인 / 달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는 저울이다
그 꿈의 무게가 무거우면 초승달이 뜨고 그 꿈의 무게가 가벼우면 보름달이 뜬다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려고 저녁마다 앞산에 뜬다
임영석 시인 / 세상
안 보이는 게 보이면 아름다운 세상이고
보이는 게 안 보이면 지옥 같은 세상이다
꽃들은 그 향기를 위해 온 몸을 다 바친다
꽃 속의 향기처럼 숨어 있는 수많은 말
감추고 감추어도 드러나는 어둠처럼
두 눈에 담지 않아도 담기는 게 꽃이다
-《시조21》 2023, 여름호
임영석 시인 / 어느 날 문득 나도
내 눈엔 저 하늘도 객이 머문 주막처럼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비바람 오고 가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슴에 품었을까
그래도 저 하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침마다 둥근 해를 손거울처럼 달아놓고 채송화 봉숭아꽃을 장독 뒤에 피운다
어느 날 문득 나도 하늘을 오른다면 꽃살문 창지(窓紙)에다 달빛이나 수놓으며 허기를 달래고 사는 너를 위로 하겠다
눈앞이 절벽이고 고독인 이 세상 삶, 두드려 만들어진 그릇도 녹이 스는데 내 어찌 푸른 청춘만 고집하며 살겠나
임영석 시인 / 큰물
온 마을을 다 삼키고 허기가 안 갔는지 범람의 물 수의를 코앞에 붙들고서 긴 혀의 속내를 그만 송곳처럼 드러낸다
죽창도 아니 들고 횃불도 아니 들고 작고 작은 빗방울이 큰 물을 이뤘으니 허공에 가득한 꿈을 만천하에 펴 보인다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말을 하겠느냐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뜻을 펴겠느냐 강물이 붉게 울 때는 세상이 다 슬픈 거다
삼백 리 강길 따라 억새꽃이 휘날려서 배고픈 내 어깨를 황혼으로 덮어주며 달빛을 흐드러지게 녹여 줬던 물 아닌가
이제는 참지 않고 신명 나게 살겠다며 천둥소리 그 탯줄을 단번에 잘라내며 물거품 두려워 않고 큰 세상을 향해 간다
짐승도 떼를 지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뼈 없는 몸이라고 귀한 줄 몰랐는데 큰물로 저리 흐르니 용이 따로 없구나
-《좋은시조》2022. 겨울호
임영석 시인 / 블랙박스, 또는 CCTV
이제는 어디서든 내가 나를 못 속인다 나보다 더 선명한 기억을 기억하는 문장의 마침표들이 눈을 뜨고 있어서다
꽃피는 봄이라고 문장을 써 놓아도 그 문장의 기억들은 눈물 없는 눈빛으로 당신의 붉은 가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정오의 뉴스에는 실종된 그 부부가 딸을 업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도 전한다
내 기억은 쓸모없이 감정만 담기지만 사실주의 철학으로 무장한 저 눈빛은 악필의 문장만 골라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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