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시인(무극) / 장승이 된 우체부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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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시인(무극) / 장승이 된 우체부
소식을 전하는 이 기쁜 소식만을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어느 때 우체부의 발길은 만근이다.
편지 들린 우체부의 손은 마을 어귀에 서있는 장승의 눈
이른 아침 유난히 까치가 울어대는 날이면 우체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앞마당이 비좁아지고 골목길로 들어서는 우체부의 자전거 바퀴 구르는 소리는 산모퉁이 돌며 웃는 기적보다도 크게 들린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고 우체부의 고단한 몸도 갔지만
빛은 바랬어도 남아있는 사연들은 장승같은 우체부의 마음을 잊지 못해서일까 아직도 가질 않고 있다.
-시집 <장승이 된 우체부>에서
김성호 시인(무극) / 좋은 사람
사진을 볼 때 시가 보이면 그 사진은 좋은 사진이다 시를 읽을 때 그림이 보이면 그 시는 좋은 시다 꽃을 볼 때 향기가 나면 그 꽃은 아름다운 꽃이다 사람을 만났을 때 시가 보이고 그림이 보이고 마르지 않는 향기가 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ㅡ시집 『꽃이 있어 좋은 날』에서
김성호 시인(무극) / 가시버시(부부)
색깔이 변치 않는 흙에서 피어난 꽃은 ... 그 향기가 다르다 그 향기로 숨을 쉬는 흙의 살갗은 꽃잎의 감촉만큼이나 부드럽다 꽃에서 나는 향기는 흙의 정낭에서 나왔고 흙에서 나는 향기는 꽃의 자궁에서 나온다.
꽃이 흙이고 흙이 꽃인 나 그리고 또 하나의 나.
-시집 <꽃의 오해>에서
김성호 시인(무극) / 처녀치마
요즘 처녀들 치마는 짧다 그것도 성이 안 차는지 더 짧은 반바지를 찾는다 세상이 변하고 유행이 변해도 치렁치렁한 치마를 고집하는 처녀가 바로 처녀치마다 봄에 피는 꽃이니 봄처녀라 바람에 마음을 들켜 자세가 흐트러질 만도 한데 산발한 머리를 숙인 채 치마를 길게 늘어뜨리고 심산유곡에 터 잡아 산다 드물게 처녀치마를 알아보고 찾는 사내들이 있긴 하지만 세속을 등진 비구니보다 더한 엄숙함과 음습함으로 곁을 잘 주지 않는 그녀다
김성호 시인(무극) / 시들지 않는 꽃
향기에 반응하는 것이 코끝인지만 알았다 짙은 향기라 할지라도 꽃이 다 지기도 전에 해체되어 사라져가지만 어릴 적 봤던 꽃이라도 사진 속 꽃일지라도 마음으로 맡은 향기는 오랫동안 시들지 않고 불사의 꽃을 피워낸다.
김성호 시인(무극) / 망해암 오르는 길
비봉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삼성사불암사-만장사 보덕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다 보면 해를 바라보고 좌정한 부처가 있는 암자 망해암이 속세를 굽어보고 편안하게 사람을 맞이한다 높은 산에 위치한 절은 아니지만 해마다 망해암에 오르는 사연이 있다 절 네 곳을 뒤로하고 나서 포장된 산길을 조금 더 걷다 보면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어도 젊은 과부의 환생처럼 보이는 뽀얀 꽃 솜나물이 길섶에 위태롭게 피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말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내년에도 이맘때쯤 망해암을 오르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성호 시인(무극) / 소리쟁이
아직 여름이 가려면 멀었는데 벌써 너의 몸뚱이는 녹슬었구나 이름처럼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으면 파릇했던 그 목소린 어디 가고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어둡고 쓸쓸한 소리를 내느냐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았는지 땅을 찢는 햇빛의 위협에도 스쳐 가는 바람을 불러 세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애쓰는 바쁜 너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김성호 시인(무극) / 군자란
본받고 배워야 할 꽃이 있다 한 줄기에서 여러 줄기로 갈라지고 줄기마다 꽃을 피워내기 때문에 많은 꽃들이 경쟁하듯 피지만 어느 꽃 하나도 도드라져 보이려 꽃 날개를 크게 벌려 잘났다고 과시하려는 짓은 하지 않는다 서로를 인정하고 공생하기 위해 일정한 크기의 언어와 몸짓으로 희생하고 양보하는 태도야말로 군자란에게 배워야 할 일이다.
김성호 시인(무극) / 폭포수
매일 걷는 것이 싫었던 게야 한번 뛰어보는 거야 ... 아니 날아보는 거지 사람들은 왜 위로만 날려고 하지 날개를 달고 뛰어내려 보는 거야 찢어지지 않는 날개를 펴고 차르 하르르 차르르르 낮은 곳으로 날을 때 비로소 세상은 깨어나고 갈증을 한숨에 날려버리는 멋진 소리를 내는 거야 언젠가 또 비천飛泉을 꿈꾸며 먼 길 재촉해 걸어가는 거지
-시집 <꽃의오해>에서
김성호 시인(무극) / 비 그친 오후
창가를 두드리던 빗줄기가 뒷걸음질치고 방안 가득한 커피향이 나른한 오후에 옷을 입힌다. 옆집아이의 방에서 들려오는 볼멘 피아노 소리 늘 꿈결처럼 들려오는 뒷산의 뻐꾸기 우는 소리 야채장수차 지나가듯 동네까치가 반짝 반짝 짖어대면 막 골목으로 뛰쳐나온 꼬마들의 자르르한 소리에 오후가 외출을 한다. 늘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는 비 그친 오후의 살아있는 풍경들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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