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석정 시인 / 단단해지는 법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1. 6. 08:00
윤석정 시인 / 단단해지는 법

윤석정 시인 / 단단해지는 법

 

 

물고기의 뼈는 가시라는것

구운 생선을 발라 먹는데

가시 하나가 목에 걸려 꺼끌꺼끌할 때

문득 알게 된 것

그리운 것들도 가시라는 것

자꾸 마음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

빼내려하면 할수록 더 아픈 것

마음의 뼈는 그리운 것

물고기처럼 마음도 뼈를 가지고

너에게 헤엄쳐 갔다 올 때

네가 내 마음에 걸린다는 것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뱃속으로

꾸역꾸역 삼켰을 때

잊어야 한다는 것

그리운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할 때

흐르는 눈물의 뼈도 가시라는것

가시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뼈를 감싸는 모든 살들은

물렁하다는 것

내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고

삼키려 할 때  

 

 


 

 

윤석정 시인 / 달 목공소1

-어느 늙은 목수 이야기

 

 

 노인은 달을 두드린다 곧 고집스러운 슬픔의 무늬가 드러난다 두드린 횟수가 촘촘할수록 거칠어진 숨이 느려진다 하루가 지나면 달에 들 수 있다 노인은 달에 피어난 고름을 모조리 파낸다 짓무른 곳곳에서 절망의 검불이 가벼이 떨어진다 노인은 이마 주름을 만진다 줄지어 드러누운 길이 어둠 속으로 꼬리를 뻗는다.

 

 달의 살점에서 떨어진 별들이 바람을 견디고 길은 더 깊숙이 생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노인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달빛에 스민다 달은 무늬가 완고한 이마에 손을 얹더니 노인의 숨결을 더듬는다 두드리는 횟수가 잦아들자 달은 조금씩 작아져 노인의 손에 잡힌다

 

 


 

 

윤석정 시인 / 호두나무에는 탄약이 없다

 

 

 질서는 혼란에서 차례를 지키는 거야. 거리에 파편처럼 박힌 이파리들을 쓸어 모으는 청소부가 호두나무를 올려다봤을 때 잎사귀는 호두를 숨겼어. 함부로 꺼내지 못한 사춘기의 일기장과 오래 간직한 열망들을 호두나무 아래 두었어. 이파리에 덮어놓은 내 열망을 청소부는 가져갔어. 나는 혼란을 얻고 말았어. 이른 아침마다 오는 청소부를 기다리며 일기장을 꺼내자 나뭇잎 사이에서 호두가 대롱거렸어. 저건 분명 총알일지도 몰라. 말랑한 껍질 속에 탄피를 숨겨놓은 호두알을 돌로 깨면 뇌관이 바스러지면서 고소한 비웃음이 폭발하겠지. 내 질서에 여기저기에 파편이 박힐지도 몰라. 혼란들이 사춘기의 호두나무 아래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데려오고 화염병을 질서라고 주장했던 대학생 삼촌도 불렀어. 내가 호두는 질서라고 하니 아버지와 삼촌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총알이 빗발치듯 떨어지면 혼란이 온다는 경고와 질서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뭉쳐야 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손으로 총구를 만들어 쏴댔고 삼촌은 잡히는 대로 집어서 나에게 던졌어. 그때 나는 일기장을 덮고 말았어. 호두나무 아래로 호두가 떨어지기 시작했어. 겨우 몸을 일으켜 나무에 등을 기대자 먹구름이 몰려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어. 아까부터 개미들이 질서 있게 아버지와 삼촌을 데리고 행군을 했던 거야. 호두나무에는 탄약이 없어서 호두가 계속 떨어져도 혼란은 터지질 않아. 나는 쓰다만 일기장을 찢어서 호두를 집었어. 질서를 감싼 혼란을 까서 차례대로 호주머니에 쓸어 담았어.

 

 


 

 

윤석정 시인 / 떫은 생

 

 

봄이 왔다 나는 설익은 약속처럼 헤어지기 바빴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여린 감들

구부러진 길 끝에 앉아 나는 태양의 부피를 재곤 했다

내 심장에 수혈하는 햇살바늘

여름부터 검은 바늘자국이 따끔거렸다

아프지 않을 때만 감들이 보였는데

감들의 낯빛은 점점 태양을 닮아갔다

새부리에 쪼인 감들은 유독 붉디붉었다

감들은 속곳을 전부 드러낸 채 떨어지거나

가까스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새들이 빼먹지 못한 감씨가 얼핏 보이곤 했다

몸을 눈부시게 열고도 길에서 떠날 수 없는

반쪽짜리 생, 그 감은 한 번 꽃피자 입을 쫙 벌리고

뿌리에 달아붙은 눅눅한 어둠까지 감아올렸다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리며

심장에 몰려와 단단하게 여물어갔다

눈이 내리자

쭈글쭈글한 감들이 서둘러 햇볕을 쬐러나왔다

더는 빨아들일 어둠이 없어서 바깥을 컴컴하게 만들기 시작했는데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이

떫디떫은 심장을 남겨놓았다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어둠을 빨아들이기 위해

가지 끝으로 옮겨 앉았다

 

 


 

 

윤석정 시인 / 커서의 하루

 

 

 현기증 나는 수신함을 비운 나는, 비워도 가벼워지지 않는 나는, 가볍게 사는 게 뭔지 모르는 나는, 커서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정원이 없는데 매일 정원을 헤매는 나는, 무수히 나를 복제하는 나는, 심장처럼 깜빡이는, 식물 없이 가꾼 정원에 사는, 하루를 시작하는, 앉았다 일어났다 오전을 보내는, 오후로 접속하는, 정원을 넓히는, 멀건 눈동자 같은, 의자에 기댄, 벽을 열면 벽이 열리는, 더 켜지 않는, 문서를 열고 닫는, 앉았다 일어났다 접힌 뱃살을 만지는, 뻐근한 허리를 펴는, 체중이 부푸는, 팔을 번쩍 올리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린 잡식성 같은, 벽이 출렁이는, 열었다 닫았다 우왕좌왕하는, 심장 없이 정원에 사는, 앉았다 일어났다 안부를 묻지 않는 수신함을 열었다 닫았다 매일 정원을 헤매는, 나보다 현기증 나는 커서가 나의 하루를 가벼이 껐다

 

 


 

 

윤석정 시인 / 웃음의 역학

 

 

 나는 웃지 않는다 당신의 웃음을 터트릴 수도 없다 웃음을 모르는 웃음은 거짓 나는 나의 웃음을 조롱한다 웃음이 웃음으로 부딪칠 때 웃음이 터지고 웃음이 번식한다 웃음과 웃음 사이사이 웃음이 퍼져나가도 웃음은 나에게 닿지 않는다 눈이 눈보다 커다란 울음을 가둔다 눈을 끔뻑이며 사라진 울음이 웃는다 당신은 잘못한 게 없다 나는 웃는다 더워도 추워도 아파도 나는 괜찮다 웃는다 나는 당신에게 닿지 못할 바보 별의별 당신이 내 속으로 들어와 전생을 누비고 다닐 때 당신은 울고 나는 웃는다 나는 어둠으로 숨고 당신은 빛으로 나온다 어느 사이 당신은 돌이 된 나를 부순다 당신은 잘못한 게 없다

 

 


 

 

윤석정 시인 / 문자 메시지에 대하여

 

 

 빛의 속도로 너에게로 달려가는 전파가 지구를 헤맨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너에게로 보낸 문자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속도는 파장이 헤맨 시간과 비례한다 사랑이란 돌에 새긴 최초의 문자보다 사뭇 지우기 쉬운 문자 메시지 우리가 문자로 사랑을 하기엔 너무나 가벼워 0과 1로 전부 표현하기 네가 그리워 가만, 화성인의 수신기에 접속을 시도하려는 수백만 헤르츠 전파가 우주의 극점에 닿지 못하고 블랙홀에서 길을 잃는다 더러는 해저 심해어의 부레에서 오리무중이 된다 양철 지붕을 탁탁 쳐 대는 빗줄기처럼 한사코 버림받은 나에게로 넘쳐 버린다

 

 


 

윤석정 시인

1977년 전북 장수군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오페라 미용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2006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2006년 제1회 내일의한국작가상 수상.